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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2/19 08:55:57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35>


운명의 수레바퀴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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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821일 아사마마루(淺間丸)에 몸을 싣고 하와이를 떠난 홍난파는 5일 후인 82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 신시내티 음악학교에 다니고 있던 친구 박경호(朴慶浩)의 집에 잠시 머물면서 대학 입학수속을 밟았다. 9월 그가 입학한 학교는 시카고에 있는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로, 그곳 연구과에서 난파는 파울젠(Paulsen, P. Marinus) 박사에게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사사하면서 음악이론과 작곡에도 혼신의 힘을 쏟았다.

 

난파의 고된 유학생활이 시작된 가운데, 해가 바뀌자 조선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항일투쟁이 조직적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목숨을 건 암약활동을 계속했다.

 

1932년 새해가 밝기 무섭게 첫 번째 거사(擧事)는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서 발생했다. 18일 김구(金九)의 지시를 받고 일본에 잠입한 이봉창(李奉昌)은 이날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가는 천황 히로히토(裕仁)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불행히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일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애국청년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온 천하에 알렸다.

 

두 번째 거사는 이로부터 3개월 여가 지난 429. 이번에는 중국의 상하이(上海)에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 폭탄 투척사건이 일어났다. 이 날은 일본 천황의 생일이기도 했는데, 도심 속 훙커우(虹口) 공원에서는 군관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24살 청년 윤봉길(尹奉吉)은 야채상으로 가장하고 잠입해 행사장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일본군 대장과 거류민단장은 즉사했고, 2명의 중장과 주중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蔣介石)“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조선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했을 정도로 일제에 저항하던 민족의 입장에서는 역사적이고도 통쾌한 의거(義擧)였다.

 

이 연속된 일련의 의거는 미국서 유학 중인 홍난파에게도 적지 않은 흥분과 애국심을 다시 한 번 고양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가 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는, 난파는 이 당시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興士團)미주본부에 가입하려고 이미 입단 신청을 해 놓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 해 그는 정식으로 가입이 되어 단우(團友)로서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홍난파의 흥사단 단우번호는 266번이며, 난파 이외의 음악가로는 253번의 김세형(金世炯)1010번인 현제명이 있었다.

 

그러나 난파가 흥사단의 단우가 되었다는 사실은 단지 그가 하나의 민족운동 단체에 가입했다는 것 이상의 커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비운의 난파선(難破船)을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이제까지의 방관자 입장을 벗어나, 몸소 그 배에 올라타서 어떻게든 구조선을 찾아나서는 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탄 배는 기관 고장을 일으켜 잠시 표류하고 있을 뿐, 기울어가는 배는 아니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선원들이 힘을 합해 수리만 한다면 다시 망망대해를 향해 항해가 가능한 배라고 그는 확신했을 것이다.

 

만약에, 운명의 시계바퀴를 다시 돌려서 만약에 난파가 그 배에 오르지 않았다면, 그는 또 어떤 인생을 살아갔을까. 또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32살의 청년이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지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장렬한 의거는 34살의 청년 난파에게도 머나먼 남의 나라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토록 고된 유학생활 속에서도 귀국할 때까지 흥사단 단우로서의 활동을 계속해 나갔던 것이다.

 

일본유학 시절에는 바이올린 연주활동 등으로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던 난파였지만, 미국에서의 생활은 전혀 사정이 달랐다. 그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란 레스토랑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음식을 나르는 일이 전부였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그해 6월에는 마침내 음악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졸업을 할 수가 있었다.

 

난파는 셔우드 음악학교를 졸업을 한 뒤에도 7개월 정도 미국생활을 계속했다. 신천지 아메리카의 문물은 그가 조선과 일본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체험을 하게 했다. 그 거대함과 풍요로움, 특히 음악에 관해서는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넘치는 활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그는 경이로움과 부러움 속에서 끊임없이 호흡하며 받아들였다.

 

단 한 가지, 불행하게도 그가 대륙을 여행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만 제외한다면. 이 사실은 난파가 930일 흥사단 미주본부에 보낸 서신을 통해 알려졌는데, 그는 이 서신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한 것과 관련 격려를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며 변호사에게 사건을 위임하여 사후 처리를 교섭 중이라고 썼던 것이다.

 

홍난파가 길지 않은 미국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이 해 12월이었다. 그는 시카고를 떠나기에 앞서 신문지상을 통해 미국 음악의 현주소를 고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수고도 잊지 않았다.

 

유명 무명의 몇 십 몇 만의 악가(樂家), 천과 만으로 헤일 음악학교, 세계 유수한 대심포니와 가극장 등 거기다가 황금의 세력으로 구주 악단의 거성들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는 이 유리한 조건,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소 방송국으로부터 연중무휴 방송하는 동서고금의 명곡과 명연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나는 미국의 국민이 음악적 국민이 아니 되려야 무슨 수로 아니 될 것인가.

 

난파가 보는 미국은 선택받은 나라였고, 그 국민 역시 넘쳐나는 풍요로움 속에서 무한대의 음악을 소비하고 향유하는 선택받은 백성들이었다. 그는 미국이 소유하고 있는 거대한 음악적 자원(資源)에 말문을 잃었고, 막강한 황금의 위력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음악의 과소비로 인한 몰가치성을 우려하는 속내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옥은 흔치 않은 까닭에 귀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는 음악이 너무 많은 까닭에 그 값을 잊어버리게 된다. 식후의 휴식이나 사교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범연히 들어 넘기는 청중을 볼 때는 아까운 생각-분한 생각까지도 날 때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이 미국사람이 되어보지 않고는 시비를 못할 일이다.

 

음악을 식후의 휴식이나 사교의 일종으로가볍게 들어 넘기는 청중들이 도대체 음악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조선의 음악가 홍난파로서는 아까운 생각-분한 생각마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풍요의 나라 미국만이 가질 수 있는 저력 중의 하나임을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해 연말 귀국길에 오른 난파는 연말연시를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내게 되는데, 해가 바뀐 193318일에는 그곳 한인교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이어 LA 흥사단 대회에 참가해서 안창호김세형 등의 단우들과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114LA를 떠난 난파가 요마하마 항에 도착한 뒤, 다시 현해탄을 건너 경성 역에서 장도(長途)의 마침표를 찍은 때는 211일 밤이 늦은 시각이었다. 실로 17개월 만에 돌아온 머나먼 여정이었다. 그러나 떠날 때와는 달리 그는 훨씬 건강해 보였고, 얼굴에서는 환한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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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겸 음악평론가(1898-1979). 홍난파와 동갑으로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 건너가 신시내티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으며, 귀국 후에는 이화여전 교수로 근무하며 활발한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서울 출생의 독립운동가(1900~1932). 히로히토 천황 암살사건으로 체포된 뒤 32살의 나이로 일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충남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1908~1932). 상하이 훙커우공원 폭탄투척사건으로 체포된 뒤 총살형을 받고 24살 나이로 순국했다.

 

1913년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 일제강점기 하에서 국민교육과 계몽에 힘쓰는 한편, 105인 사건3.1운동동우회사건 등과 연루되어 탄압을 받는 등 독립운동에도 직접 간접으로 참여했다.

 

평양 출생의 작곡가(1904~1999).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전공했다. 1933년 흥사단의 단가(團歌)를 작곡했으며 귀국 후에는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했다.

 

⑥ 『흥사단운동 70년사()흥사단 출판부, 1986.

 

민병석 도산 안창호 자료집2국회도서관, 1998.

 

홍난파 市俄古(시카고) 광상곡<조선일보> 19321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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