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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2/26 15:58:44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36>


귀국 선물-가곡과 실내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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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은 세계적 경제공황으로 국제적 정세가 어느 때보다도 불안정한 가운데, 또 다른 세계대전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해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나치스 정권이 수립되었고, 미국에서는 루스벨트가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해 뉴딜정책을 펼치면서 세계경제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한편 일본은 이해 3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국제연맹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괴뢰정권으로 보고 그 정통성을 부인했고 만주에서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반발한 당시 일본 대표 마츠오카 요스케(松岡洋右)는 그 자리에서 연맹 탈퇴를 선언하고 퇴장해 버렸다.

 

그는 지금 일본은 침략자로 지탄을 받고 있으나, 언젠가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전 세계의 숭앙의 대상이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며, 일본이 향후 독자적인 길을 갈 것임을 밝히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침략전쟁의 주동자이도 했던 마츠오카의 말처럼, 일본은 이후 미영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론을 펼치면서 군비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2월에 경성으로 돌아온 홍난파는 다시 예전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는 귀국하자 곧바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한편, 4월에는 그동안 몸담아 왔던 중앙보육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경성보육학교로 자리를 옮겨 음악교수로 부임했다. 이어 5월에는 경성공회당에서 귀국 독주회를 열고 그리그의 <Sonata No.2>, 멘델스존의 <Concerto> 등을 연주해 오랜만에 대하는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뿐만 아니라 1010일에는 정동 이화여자전문학교 강당에서 창작곡 발표회를 열었다. 특히 이날 무대는 현제명과 짝을 이뤄 공동으로 작품 발표 연주회를 개최함으로써 음악계의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했는데, 그것은 이 무대가 우리나라 최초의 작곡 발표회였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서 홍난파는 <장안사> <옛 동산에 올라> <사랑> 등을 선보였고, 현제명은 <가고파> <그 집 앞> <뱃노래> 등의 작품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난파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는 교단에 복귀하는 일 외에도 두 가지 커다란 목표가 있었다. 그 하나는 새로 작곡한 가곡들을 모아 출판하는 일이었고, 또 한 가지는 조선에서도 실내악단을 만들어 이를 활성화시켜보려는 야심이었다.

 

516, ‘연악회에서는 기념비적인 출판물 2종을 같은 날 발간했다. 하나는 조선동요백곡집하편이었고, 또 하나는 조선가요작곡집이었다. 조선동요백곡집하편은 난파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등사본으로 발간했던 것을 이때에 이르러 다시 인쇄본으로 정식 출판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가요작곡집은 위에서 말한 난파의 두 가지 목표 중의 하나로, 그가 새로 작곡한 가곡들을 모은 출판물이었다. 이 당시까지도 가곡이란 용어는 아직 정착이 되지 않아 가요로 표기했음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조선가요작곡집은 난파가 미국에서 귀국하며 가져온 선물 보따리중의 하나였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선물은 흔히 볼 수 있는 선물이 아니었다. 난파에 의해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그야말로 주옥 같은 선율이 그 속에는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모두 16. 그 대부분이 그의 미국 유학시절 만들어진 걸작품들이었음을 감안해 보면, 그가 고된 미국생활 속에서도 고국을 그리면서 작곡활동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가 있다.

 

특히 난파가 이 가곡들을 만들 때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의 시조에 곡을 붙였다는 것은 민족적 정서와 심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와 열망을 무엇보다 잘 나타내주고 있다. 조선가요작곡집에 수록된 곡은 다음과 같다.

 

1./ 2.봄처녀/ 3.할미꽃/ 4.개나리/ 5.고향생각/ 6.옛 동산에 올라/ 7.옛 강물 찾아와/ 8.입 다문 꽃봉오리/ 9.사랑/ 10.성불사의 밤/ 11.관덕정/ 12.그리움/ 13.만천교 위에서/ 14.장안사/ 15.금강에 살으리랏다/ 16.사공의 노래

 

시조(時調)를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민족정서를 노래했던 겨레의 시인. 난파는 자신보다 5살 연하의 이 청년시인을 평소부터 좋아했고, 그래서 주저 없이 노산의 시조를 택해 자신의 곡을 붙였던 것이다. 위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의 <사공의 노래>만이 함호영 작사이며, 그 나머지가 모두 이은상 작사였다는 점을 보아도 난파의 작곡 동기와 의도는 잘 설명이 된다.

 

홍난파가 두 번째로 풀어놓은 선물 보따리는 실내악단(室內樂團)의 창단이었다. 그는 오랜 전부터 국내에서도 실내악이 활성화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 왔다. 그리고 이 실내악운동을 본격적으로 시도하려는 의도에서 탄생된 것이 난파 트리오였다. ‘난파 트리오는 이름 그대로 홍난파를 비롯한 3명의 연주자로 구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악단이었으며, 최초의 바이올린 3중주단이기도 했다.

 

홍난파가 제1바이올린을 맡았고, 조카인 홍성유가 제2바이올린을, 그리고 동경고등음악학원 4년 후배인 이영세(李永世)가 제3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여기서 제1, 2, 3이란 구분은 난파의 말처럼 연주의 비중에 의한 순서는 아니고, 다만 나이순에 따라 붙여진 구분에 불과했다.

 

3개월 정도 연주의 호흡을 맞춘 세 사람은 이해 6, 당시 진고개에 있던 명치제과(明治製菓) 홀에서 음악가와 사회 명사 등 70여명을 초청해 첫 시연회를 가졌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난파 트리오는 마침내 915일 서울 정동의 모리스홀에서 제1회 연주회를 개최함으로써 정식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3개의 바이올린만을 위한 작품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난파 트리오는 여기에 피아노 반주를 덧붙인 형태로 연주를 했다. 따라서 이들의 무대 곁에는 대부분 피아니스트 김원복이 함께 자리를 했다.

 

어쨌거나 난파 트리오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1회 연주회에서 충분한 가능성을 확인한 그들은 그로부터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14, YMCA 강당에서 제2회 연주회를 개최했고, 연주활동은 이듬해에도 계속 이어졌다.

 

난파가 처음 트리오를 구성할 때의 의도는 장차 비올라와 첼로를 포함시켜 현악4중주로 악단을 이끌어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난파 트리오는 그 전초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과 3년 뒤 찾아온 홍성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난파의 이러한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홍성유의 급서(急逝)는 이제 막 꽃이 피려는 실내악의 발전을 위해서도 가슴 아픈 일이었고, 특히 그의 처 김원복에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비극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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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외교관, 정치가(1880~1946). 2차 세계대전 후 A급 전범(戰犯)으로 극동재판소에서 심리 중 옥사했다.

 

경남 마산 출생의 시조시인(1903~1982). 일생을 시조와 민족의식 앙양이라는 두 길을 위해 진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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