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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3/06 13:45:06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37>


'1인 5역' 제2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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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귀국한 뒤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교수로 재직하면서 연악회를 운영하는 한편, ‘난파 트리오를 조직해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홍난파에게, 해가 바뀌자 그에게는 또 다시 두 가지의 직함이 추가된다. 하나는 이 해 새로 결성된 경성관현악단의 지휘를 맡게 된 일이고, 또 한 가지는 일본 빅터(Victor) 레코드사의 경성지점 음악주임에 취임을 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15역을 그는 수행하고 있었다.

 

경성관현악단은 JODK의 전속 관현악단으로, 당시 양악계에서 경험과 능력이 풍부한 홍난파를 지휘자로 초빙한 것이다. 이 관현악단이 정식 경성방송관현악단으로 출범하는 것은 이보다 2년 뒤의 일이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최고의 연주자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한국 교향악단 역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특히 이들은 일정한 보수를 받고 연주했기 때문에 최초의 직업 연주단체라는 기록도 동시에 남겼다.

 

또한 빅터 레코드사는 오케 레코드콜럼비아 레코드와 함께 일제강점기의 3대 레코드사 중의 하나로,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부른 <황성옛터>를 발매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던 대형 음반제조회사였다. 난파는 이를 계기로 이후 자신의 많은 작품을 음반으로 발매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난파가 15역을 하던 그해 그러니까 19344월 말,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있던 윤극영이 조선으로 돌아왔다. 홍난파의 동경음악학교 3년 후배이기도 한 그는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에 머물고 있었는데,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확산되자 서둘러 귀국을 했다. 고국에서 <설날><반달>을 발표한 그는 1925년 다시 간도(間島)로 넘어가 그곳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그의 귀향은 거의 10년 만의 일이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반달> 노래는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새롭거니와 이 노래의 작사자요 작곡자인 윤극영(尹克榮)씨는 성악(聲樂)에도 탁월한 천재(天才)가 있어 그를 아는 이는 오히려 씨의 성악에 더 큰 촉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행히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씨는 15년 동안의 침묵을 깨트리고 단연 조선에 돌아와서 절대의 자신을 가지고 첫 무대를 밞으리라 한다.

 

당시 <반달>이 얼마나 널리 알려지고 불리었는지는 신문에서 소개한 대로였다. 특히 윤극영은 작사 작곡 외에 성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귀국한 다음 달 경성에서 첫 독창회까지 열게 되었다. 이때 그를 아끼는 수많은 각계인사가 윤극영후원회를 조직하고 그의 처녀무대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발기인이 40명을 넘었는데, 음악계의 인물로 홍난파를 비롯하여 김인식 김형준김영환현제명채동선홍성유김원복윤석중 등이 포함된 것만 보더라도 당시 31살이었던 윤극영에 대한 애정과 기대를 엿볼 수가 있다.

 

그런데 이해 5월 난파에게 돌연 뜻하지 않은 병마가 찾아왔다. 심한 감기 증세로 며칠간 자리에 누었던 그는 결국 병원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집안에 의사가 네 명이나 있는 난파였지만, 이 날은 내과 전문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병명은 늑막염이었다. 난파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적지 않게 놀랐지만, 죽을 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가벼운 마음으로 입원수속을 밟았다.

 

바로 그 다음 다음날 아침입니다. 난데없이 등기 '가끼도메'우편 한 장이 날라 왔습니다. 이상히 생각하고 급히 떼어본 즉 그것은 먼 곳에 있는 나의 맏조카한테서 내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보내준 돈표였던 것입니다. 생일(?)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날은 과연 내 생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십여 년 동안을 두고 객지로 떠돌아다닌 까닭에 나는 이 몇 해 동안에 한 번도 생일을 기억해 본 적이 없습니다. ……(중략)…… 제 생일도 모르고 지난 것을 원통하거나 처량하게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 날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멀리서 축하편지와 돈까지 보내어 준 조카의 사랑과 정성에 나는 눈물지우며 감격했던 것입니다.

 

상처를 한 뒤 줄곧 독신으로 바쁘게 살아온 난파에게 생일을 잊고 사는 일은 원통하거나 처량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파서 자리에 눕고 보니 생일도 잊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한 번쯤 돌아보는 일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새삼 일깨워준 사람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조카였다.

 

그 조카란 물론 목포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 홍재유였다.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일을 이날따라 그가 눈물지우며 감격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시 3년 만에 재발한 늑막염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 자신의 무력한 존재감을 느꼈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병실에서 난파가 느꼈을 막연한 불안감과 무력한 존재감은 곧 이어 발생한 파인애플 사건으로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병실에 누운 난파는 학교에도 연락을 해서 불가불 당분간은 결근을 해야겠다는 사유를 설명했다. 이 사실은 곧 경성보육학교 학생들에게도 알려졌고, 그날부터 날마다 여러 명의 학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교대로 문병을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곤란한 것이 있었습니다. 허구한 날 뒤를 맞대어 찾아오다시피 하는 그 많은 학생들이 마치 '클라스 회'에서 결의나 한 듯이 한결같이 파인애플 한 통씩을 사가지고 옵니다 그려. 한두 통쯤은 좋고 10여 통까지도 좋았습니다마는 2030나날이 늘어가니 무슨 수로 이것을 다 처치하겠습니까? 제 몸이 성하다 치고서라도 하루 한 통씩이면 2~3일 후에는 물릴 것을 자리에 누워서 앓는 놈이 모과수를 먹으면 몇 통이나 먹겠습니까?

 

학생들은 누구로부터 전해 들었는지, 아니면 늑막염에 모과수가 좋은 과일이라고 알고 있었는지, 너도나도 모두 모과수만 사서 들고 왔다. 그렇다고 제발 모과수는 사오지 말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다른 것을 사가지고 오라는 것 같아서난파는 한 달간에 걸쳐 그 많은 통조림을 모조리 처치했다. 그때 병석에 누워 그는 모과수를 먹을 때마다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이제 독신생활을 마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날 이후 난파가 떠올린 얼굴 중에는 그의 제자도 한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해 경성보육학교를 갓 졸업하고 소프라노 가수로 활동을 시작한 이대형(李大亨)은 난파보다 나이가 열다섯 살이나 어렸다. 당시 21살의 이대형은 학생시절부터 노래를 잘 불러서 음악회에도 빠지지 않고 출연해 독창을 불렀다.

 

학생시절부터 이대형을 눈여겨봐 오던 난파는 그녀가 졸업하던 해의 봄, 그러니까 그가 갑자기 입원을 하기 얼마 전,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스승이라고 해도 남자 혼자 사는 집을 방문하기가 망설여졌지만, 곧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던 때라 작별인사를 겸해서 난파의 집을 찾아갔다.

 

그날 난파는 미국생활에 익숙해져 있던 탓인지 자신이 손수 차를 내오는가 하면, 학교를 떠나는 이대형에게 장래의 계획 등을 묻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리에서 일어설 준비를 하는 그녀에게, 난파는 좋은 사람을 한 명 소개하고 싶다며 서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난파 자신의 사진이었다. 당황한 그녀는 잠시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그대로 난파의 집을 나서고 말았다.

 

이대형은 그 이튿날 바로 함경도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고, 그곳에서 어느 유치원 교사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가 보기에 난파의 행동은 너무도 돌발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프러포즈로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두 사람은 계속 서신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계절이 두 번 바뀐 뒤에는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 해 1227, 서울 아현동신학교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백년가약을 맺었다. 난파로서는 28살에 부인과 사별한 뒤 8년 만에 다시 가정을 꾸리는 가슴 벅찬 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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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개국한 경성방송국의 콜사인(방송 호출부호)이다. 도쿄(AK), 오사카(BK), 나고야(CK)에 이은 일본의 네 번째 방송국이란 의미로 붙여졌다.

 

이상만 한국교향악단의 역사와 현주소한국지휘자협회.

 

<매일신보> 1934427일자.

 

かきとめ()등기우편물의 일본어 표기.

 

홍난파 모과수 30<신가정> 193411월호.

 

껍질을 벗긴 파인애플을 썰어서 설탕물에 담근 통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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