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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3/12 09:25:52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38>


막 오른 '홍파동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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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가 김대형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신혼살림을 시작한 곳은 서울 종로의 홍파동이었다. 오랫동안 조카들과 일가를 이루어 살던 창성동 149번지를 떠나 독립을 한 것이다. 난파가 이후 만년까지 보내던 홍파동 자택은 그 지명이 난파의 이름과 유사해서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홍난파(洪蘭坡)와 홍파동(紅把洞)은 전혀 관련이 없다. 우연히 이름이 비슷한 지명에 난파가 살았을 뿐이다.

 

그가 새로 구입한 단층 양옥은 1930년 독일인 선교사가 지은 집으로, 건물의 외벽은 물론 거실에도 붉은 벽돌로 치장한 벽난로를 설치하는 등 1930년대 서양인 주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가옥이었다.

 

또한 그의 집 주변에는 음악가들도 살고 있었는데, 바로 윗집에는 윤심덕의 언니인 성악가 윤심성과 피아니스트 동생 윤성덕이 살았고, 동양 최고의 테너로 평가받던 성악가 이인선(李寅善)의 집 역시 난파의 집과 바로 이웃하고 있었다.

 

난파는 이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며 그동안 잊고 살아왔던 가정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뒤늦게 마련한 보금자리에 그는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정성스런 애정을 쏟았다. 마치 8년간의 무관심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5~6년 전에 서촌(西村) 홍파정(紅把町)산 언덕 위에 조그마한 양옥을 만들고서 오랫동안의 홀아비 생활을 청산하고 새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다행히 집 앞에는 빈 터가 40~50평 있었으나 원체 집터 전부가 바위임으로 이것을 이용하기에 별 궁리를 다해 본 나머지, 4년 전에는 이 빈 터에다 흙을 2~3자 부어 올리고는 화초와 정목(庭木)을 빽빽이 심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위 위에 심은 나무들이라 여름 한 철은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지 않으면 말라죽을 형편이므로 매일같이 아침이면 화초에 물을 주고 저녁때면 나무에 물을 주는 외에, 일요일이나 다른 노는 날에는 가위를 가지고 나무를 가다듬어 주어서 인제는 제법 정원의 꼴이 되었습니다.

 

홍파정언덕 위에 세워진 난파의 집은 가파른 경사지를 이용해서 지은 주택이었기 때문에 집터의 대부분이 바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년간 공을 들여 이 황량한 빈 터를 멋진 정원으로 바꿔놓았다. 그의 표현대로 바위정원[岩庭]을 꾸민 것이다.

 

결혼 뒤 생활에서 안정을 되찾은 난파는 홍파동시대를 연 이해 1935년에는 더욱 왕성한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음악의 기초지식」 「음악가 생활안정책」 「째즈나 유행곡이 일반가정에 미치는 영향」 「악실여운(樂室餘韻)등 음악평론과 수필을 신문과 잡지에 잇따라 발표하는가 하면, 신민요와 대중가요로까지 작품 활동의 영역을 넓혀갔다. 이것은 그가 빅터 레코드사의 음악주임이라는 역할 때문에 틈틈이 손을 댄 것으로 보이지만, 그해 10월에는 마침내 그가 작곡한 영화음악이 세상에 첫 선을 보이게 된다.

 

1935104일은 한국영화사에 새로운 장을 연 작품이 관객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날이다. 이날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조선에서 볼 수 있는 영화란 변사(辯士)들이 관객을 웃기고 울리던 무성영화시대였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달랐다. 무엇보다 관객들을 놀랍게 만든 것은 영화 속에서 소리가 함께 나온다는 점이었다. 영화 속 배우들이 직접 대사까지 연기할 뿐만 아니라, 생생한 다듬이 소리가 귓전에서 들리고 대문 여닫는 소리가 들릴 때의 그 신기함이란……. 관객들은 별세계에 와서 앉아있는 느낌마저 들었을 것이다.

 

물론 대사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라든가, 구성에 짜임새가 부족했다든가, 기술적으로도 허술한 점은 있었지만, 당시의 관객들에게 그런 정도는 옥의 티에 불과했다. 때문에 입장료가 2배나 비싼 1()이었지만 단성사 앞은 관객들의 행렬로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다. 입장료가 이렇게 뛴 것은 제작비가 3배나 들었기 때문이었다.

 

1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춘향전>의 대히트 비결은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그대로였다.

 

104일 종로 단성사 앞에는 <춘향전> 포스타가 걸려 있었고, 그 앞으로 구경꾼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주인공들이 말하는 소리는 물론 다듬이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까지 관객들의 귀에 들렸다.

 

토키영화 <춘향전>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최초로 영화음악이 삽입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제까지의 무성영화에서 배경음악이란 변사의 효과를 돋우기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무대 옆에 마련된 오케스트라 박스에서 몇 명의 밴드가 변사의 연기를 따라가며 필요한 음악을 연주했다. 그러나 영화 <춘향전>에는 변사도 없을 뿐 아니라 밴드도 보이지 않았다. 배경음악 역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춘향전>의 배경음악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홍난파였다. 그가 이때 작곡한 주제가 그리운 광한루십장가는 음반으로도 발매가 되었는데, 당시 빅터 레코드사 전속가수였던 김복희(金福姬)가 불렀다.

 

이 영화를 계기로 삼천만의 연인으로 불리며 최고의 스타덤에 오른 배우는 문예봉(文藝峰)이었다. 그녀는 이보다 3년 앞서 16살의 나이로 무성영화 <임자없는 나룻배>에 나운규와 함께 출연하여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던 여배우였다. 여기에 <춘향전>의 주인공을 맡으면서 그녀는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조선 최고스타의 영예를 누릴 수가 있었다.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나온 이후 오랫동안 전성기를 누려왔던 무성영화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렸다. 이와 함께 한때는 일류 영화배우보다도 인기를 누렸던 변사들 역시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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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 종로구 홍파동 2-16번지의 가옥. 20049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90호로 지정되어 전시장 및 공연장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현재 종로구청에서 소유 및 관리를 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성부의 홍문동(紅門洞)과 파발동(把撥洞) 등이 통합되어 홍파동이 되었고, 1936년 일본식 지명 개편에 따라 홍파정(紅把町)이 되었다. 해방이 된 후 다시 지금의 홍파동으로 불리고 있다.

 

홍난파 암정(岩庭)’ <여성> 19407월호.

 

문예봉(1917~1999)은 인기 절정기인 1937년 극작가 임선규와 결혼했는데, 1944년 돌연 영화계 은퇴선언을 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나 해방 뒤에는 민족주의 운동과 관련해 현상금까지 걸린 수배자로 도피생활을 했고 결국 1948년 남편과 함께 월북했다. 그녀는 북한에서도 배우 활동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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