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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3/19 13:20:33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39>


신민요-유행가-영화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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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흔히 유행가라고도 불리는 노래가 음악의 한 장르로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이 시기는 축음기와 라디오의 보급이 활발해지면서 자연히 대중가요 역시 상업성과 대중성이라는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킬 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은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음반으로 발매되면서 그 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대중가요는 1927년 창작가요 제1호로 알려진 김서정(金曙汀)<낙화유수>1932년 전수린(全壽麟)황성옛터등을 거치면서 더욱 대중 속으로 그 뿌리를 내리게 된다.

 

한편 대중가요가 전성기를 맞이하기 이전 또 한 부류의 음악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른바 신민요(新民謠)라고 불리던 노래가 그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부터 불리어오던 민요가 서양음악과 만나 새롭게 변형된 형태로, 그 배경에도 역시 유성기와 음반이라는 매체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물론 트로트 노래에 밀려 점차 그 힘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가수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이며, 많은 작곡가들이 이들을 발굴해내 연습을 시키고 음반 취입을 돕기도 했다.

 

당시 빅터 레코드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홍난파 역시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1930년대에 걸쳐 많은 작품의 신민요와 대중가요를 작곡했고, 영화 <춘향전>의 주제가도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난파가 작곡한 대표적인 신민요로는 <방아 찧는 아가씨의 노래>(1931), <녹슨 가락지>(1931), <압록강>(1934), <오월 단오>(1936), <청공 구만리>(1936), <세골 큰 애기>(1936), <방랑곡>(1938) 등이 있다.

 

또한 그가 작곡한 대중가요는 이보다 수가 많은데, <백마강의 추억>(1935), <우지마서요>(1935), <님의 향기>(1935), <내가 만일 남자라면>(1936), <내가 만일 여자라면>(1936), <외로운 사랑>(1936), <망향곡>(1937), <유랑의 나그네>(1937), <청춘마력>(1937), <여인호소>(1939), <인생은 30부터>(1930년대 말), <임 실은 배>(1930년대 말), <이역의 길손>(1930년대 말), <다녀가 주세요>(1930년대 말)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난파가 신민요와 대중가요를 작곡한 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그것은 난파가 이들 유행가들을 발표할 때는 나소운(羅素雲)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그가 평소 유행가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애초의 창작 포부와는 달리 그는 유행가를 작곡하며 계속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벽이란 물론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음악세계와의 괴리였을 것이다.

 

홍난파가 유행가를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은 그가 잡지 등에 기고한 글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그가 보기에 발육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유행가를 들려주는 것은 천진난만한 순정을 꺾어버리고 못된 성격을 길러주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나, 노래의 내용이 아름답지 못한 속가의 종류는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는 것이 좋다며 어른들을 주의를 당부했다.

 

또한 유행가의 해악은 아이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고 난파는 강조했다. “나는 여학생들이 시속의 난잡한 유행창가를 함부로 부르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미워하고 반대합니다. 차라리 해는 있을지언정 이익은 조금도 없으리라 생각하는 까닭이올시다.”이쯤 되면 그가 어떤 시각에서 유행가를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자명해진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던 홍난파가 왜 스스로 유행가를 작곡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빅터 레코드사와의 관련설과 생활의 어려움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행가의 미화(美化)’에 그가 상당한 의욕을 가졌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음악에 계급성이 있을 것인가하고 반문하며 신고송과 지상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난파였지만, 1930년대 대중들의 음악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유행가였고, 그 중심에 대중가요가 있었다.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그 대중가요의 수준을 좀 더 끌어올릴 방법은 없을까. 조선 유행가의 질적 향상. 이것은 난파가 빅터 레코드사에 입사할 당시부터 갖고 있던 포부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의 양악계 인사들 중에서 유행가를 작곡한 사람이 비단 홍난파만은 아니었다. 안기영정순철을 비롯해 현제명박태준정사인 등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그 작품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어떤 이유에서였건 유행가 창작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난파의 유행가 미화노력은 그가 뜻한 바대로 결실을 맺지 못했고, 결국 자신의 작품에 만족을 못하게 되자 그는 유행가 작곡가로서의 나소운이란 예명을 사용하게 된다. ‘가곡가요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던 난파는 작곡자의 이름을 구분함으로써 음악의 장르를 구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은 영화 <춘향전>의 주제가를 작곡한 홍난파가 이 경우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것을 보아도 그의 고민과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춘향전> 역시 일종의 유행가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영화 주제가란 점에서 그로서는 일반 유행가와는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대중가요는 음악성의 귀천(貴賤)을 떠나 그 자체로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예술인 것이다. 가요가 유행가로서의 전파력을 얻는 근원도 여기에 있고, 세월이 가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생명력의 비결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난파가 일보 격상된 유행가를 만들고자 했던 초기의 시도는 그런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지만, 한국 대중가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유행가와 예술가곡의 분리는 노래 부른 사람의 사회적 계층의 분리와 연관이 있다. 초기의 유행가가 기생 출신에 의해 불렸던 반면, 가곡은 중류 또는 상류의 성악공부를 한 개화된 계층에 의해 불려졌다. 가곡과 가요가 선명하게 분리된 증거를 명백히 제시해주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홍난파 자신이었다. ……(중략)…… 홍난파가 만일 나소운이라는 예명이 아닌 홍영후라는 본명이나 홍난파라는 이름으로 유행가를 작곡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면 이는 현 대중가요의 제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위의 문장에서 보듯이 만일 나소운이라는 예명이 아닌 홍난파라는 이름으로 유행가를 작곡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면.” 만일 그랬다면 지금의 대중가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을까. 확실히 대중음악이 일반인의 생활 속으로 밀접히 파고드는 시간은 보다 단축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1930년대에 가능했을 용기란 어떤 식으로 설명이 가능할지 언뜻 머리에 떠오르질 않는다. 혹시 상류의 성악가가 기생이 되어 유행가를 부를 수 있는 용기정도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히 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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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찬 홍난파 자료집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1995

 

홍난파 가정과 음악<신가정> 19337월호.

 

홍난파 <신여성> 19346월호.

 

安基永(1900~1985). 충남 공주 출생의 성악가, 작곡가. 배재학당에서 김인식에게 음악수업을 받았으며, 민요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6.25 전쟁 때 부인과 함께 월북했다.

 

鄭淳哲(1901~?). 충북 옥천 출생의 동요 작곡가. 동경음악학교를 나와 방정환과 색동회 활동. <졸업식 노래> <짝자꿍> 등을 작곡했고,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서우석 한국 대중가요의 가사분석<예술과 비평> 198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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