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즐겨찾기  l  시작페이지  l  2017.5.27 (토)
close

5
4
3
 http://artsnews.mk.co.kr/news/252388
발행일: 2013/03/26 08:40:58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40>


난파와 조선의 재즈음악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주소복사

홍난파가 음악활동을 하면서 줄곧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분야가 또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재즈음악이었다. 물론 지켜본 것만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재즈밴드에서도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재즈는 흔히 알려져 있듯이, 미국 흑인의 민속음악과 백인의 유럽음악이 결합해서 1910년대부터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음악이다. 조선에서도 1920년대 말이 되면 경성을 중심으로 재즈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재즈는 1925년 조선축구단을 이끌고 상하이로 원정 갔던 백명곤 단장이 재즈악보와 악기를 사가지고 귀국하면서 처음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한반도 최초의 코리안 재즈 밴드(Korean Jazz Band)’라는 경음악단이 정식으로 결성된다. 홍난파도 이때 멤버가 되어 피아노를 연주하게 되고, 백명곤은 제1색소폰 주자로, 그리고 난파의 맏조카인 홍재유도 바이올린 주자로 참가했다.

 

코리안 재즈 밴드는 그 해 종로 YMCA 강당에서 첫 공연을 개최한데 이어, 1929년에는 광주 등 지방공연까지 열며 대중들의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특히 이 해에는 경성방송국에도 출연해 재즈가 처음으로 방송전파를 타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신문기사에도 코리안 재즈 밴드가 자선연주회를 개최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코리아 째즈 밴드 주최, 조선여자학원 후원으로 명() 22일 오후 7시부터 장곡천정(長谷川町) 공회당내에 가장음악(假裝音樂) 대연주회를 개최한다는데, 당야(當夜)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재즈밴드외에도 홍난파군의 양산도’, ‘방아타령등 흥미 있는 순서도 있고, 또 기발한 가장 음악대회인 만큼 일반의 인기를 끌고 있는데 동야(同夜)의 수입은 전부 조선여자학원에 기부하기로 되었다더라.

 

이때 홍난파는 재즈 피아노 연주 외에도, 당시 널리 불리어지던 민요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해 청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당시 재즈밴드는 가장음악(假裝音樂) 연주회라는 명칭이 붙을 만큼 연주자들의 복장도 특이했다. 더구나 그들의 무대 매너는 자유분방했고 과장된 제스처마저도 서슴지 않았다.

 

<코리안 재즈밴드>는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젊은 피에 끓는 남녀들에게는 어지간히 큰 환호를 받았었다. 더욱이 멋에 멋을 부리느라고 악사들이 가장(假裝)까지 한다. 어느 악단에서든지 제일 얌전꾸러기 노릇을 하는 피아니스트까지 어깨 짓을 움찔움찔하다가는 곡조가 가경(佳境)에 들어가 흥이 넘치게 되면 건반 위에서 손끝은 난무(亂舞)를 시작하고 고개 짓 허리 짓까지 하더니 종국에는 엉덩이 짓까지 나오고 만다.

 

당시 경성에서 유행하던 재즈 공연을 묘사한 위의 글은, 재즈가 특히 젊은 남녀들을 열광시킨 음악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이 무렵 서른을 갓 넘겼을 난파가 열정적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이 눈에 잡힐 듯이 선하다.

 

이미 조선 양악계의 중진으로 발돋움한 난파가 세기말적 향락생활또는 현대인의 병적 취미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던 재즈에 심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먼저 재즈가 젊은이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이유부터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난파 자신도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청춘 남녀의 정열을 태울 대로 태우며, 그네의 맥박과 심장의 고동을 끝없이 고조시킴은 웬 까닭인가?” 하고 물었던 것이다.

 

첨예한 현대인은 자극 없이 휴양할 수 없으며, 자극 없이 그 원동력을 소생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째즈 음악이란, 고전에 심취된 때의 청신제로 또는 심신 자극제로 실로 백퍼센트의 효과를 지니고 출현한 것인 만큼, 시대인의 욕구에 적응하는 이 신음악은, 그것이 고전에 대한 반역이거나 이단이거나는, 오히려 제2()로 돌리고서라도, 또는 국법이 이것을 금지하거나 말거나, 결국 아무 효과가 없을 만큼, 시대인은 자기네 시대의 총아(寵兒), 위안물로, 또는 신경 자극제로, 이 반역아를 환영하고, 이 이단자와 영합하는 것이다.

 

재즈를 바라보는 난파의 풀이는 명쾌하다. 재즈가 고전에 대한 반역이라거나 이단이라거나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가 않다. ‘첨예한현대인에게는 휴식의 개념도 달라져야만 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자극이다. 즉 노동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휴양의 한 방법으로 적절한 심신의 자극을 구하게 되었고, 재즈는 바로 이러한 시대인의 욕구에 잘 맞아떨어지는 새로운 음악 장르라는 것이 난파의 지론이었다.

 

난파가 재즈 예찬론을 편 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재즈가 단지 당대의 정신 자극제로서의 역할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과거의 유장하고 전아한 음악은 현대인의 피폐된 심신을 휴양시키기에는 너무나 그 힘이 유약하지나 않을까생각한 난파는, 그 새로운 대안으로서 재즈가 신예술 형식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보기에, 1930년대를 지나면서 재즈는 이미 신음악(新音樂)’ 형식으로 음악의 한 분야를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전음악과 째즈를 비교하려 함도 아니요, 동시에 고전을 물리치고 째즈는 추장(推獎)하려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오직 시대가 해결해 줄 문제인 까닭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생활과 그 호흡, 그 템포를 같이 하는 음악이야말로 우리 생활의 추진기가 되지나 않을는지. 과거에 있어서 문학이나 미술보다 항상 시대에 뒤떨어져 오던 음악이, 째즈라는 신예술 형식의 현출로 말미암아 제타(諸他) 예술보다 가장 앞서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유쾌를 느끼는 바이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덧붙인다면, ‘재즈라는 신예술은 다른 예술보다도 가장 앞서서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세계 문예사조의 흐름에서 볼 때 항상 문학이나 미술보다 뒤떨어져 오던 음악이 처음으로 이들을 앞질러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난파는 유쾌(愉快)했다. 그래서 재즈의 탄생에 그는 일종의 쾌감마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난파가 째즈음악에 대하여그의 견해를 밝힌 것은 위의 19382월의 글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군국화의 길로 치닫고 있던 일제에게 재즈는 미국영국 등 적성국(敵性國)의 음악이었다. 따라서 점차 검열과 단속이 강화되었고, 이후 재즈는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표면상으로는 사라진 음악 장르가 되고 말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매일신보> 19281221일자.

 

② 「경성의 재즈<별건곤(別乾坤)> 23.

 

홍난파 째즈 음악에 대하여<조선일보> 1938227일자.

 

홍난파, 같은 글.

 

 

  l   회사소개   l   광고안내   l   개인정보취급방침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