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즐겨찾기  l  시작페이지  l  2017.7.24 (월)
close

5
4
3
 http://artsnews.mk.co.kr/news/252389
발행일: 2013/04/02 09:37:57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41>


이 땅에서 조선인으로 산다는 것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주소복사

193689, 라디오를 통해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중계방송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솟구쳐 오르는 애국심에 목이 터져라 만세를 열창했다. “골인, 골인을 연발하며 마이크를 흔들어대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격앙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마라톤에서 우승한 이날, 일본을 통해 중계된 베를린 승전보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조선인들에게 암흑을 밝히는 등불이었고, 한여름 무더위를 식히는 가슴 후련한 청량제였다. 비록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대회였지만, 그것은 분명 조선인 모두의 승리였기에 그 벅찬 기쁨을 나누는 데에 남녀와 노소의 구별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 해 <동아일보>상록수를 연재해 큰 인기를 모았던 심훈(沈熏)은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곧바로 시()로 옮겨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했다.

 

, 조선의 남아여! 마라손에 우승한 손, 남 양군에게

 

전략(前略)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祖國(조국)戰勝(전승)을 전하고저

마라손 험한 길을 달리다가 絶命(절명)한 아테네의 兵士(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勇敢(용감)하였던 先祖(선조)들의 精靈(정령)加護(가호)하였음에

勇士(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어 잡고

() 世界(세계)人類(인류)를 향하여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族屬(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망국의 한을 안고 살아가던 반도 조선인들을 그토록 열광시킨 것은 조선인이 세계를 제패했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슴 벅찬 사실은 아직도 조선이, 조선인이 죽지 않았음을 세계만방에 일깨워주었다는 통쾌함이었다. 그러기에 심훈도 비록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지만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며 가슴을 펴고 외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격의 마라톤 열기가 채 식기도 전인 818, 홍난파는 자신의 한 쪽 팔과도 같았던 음악의 동반자 홍성유를 잃는 충격과 비탄에 빠지고 말았다. 조카 홍성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말미암아 난파가 애써 키워온 실내악단 난파 트리오역시 해체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때 홍성유의 나이 불과 28, 동갑내기 피아니스트 김원복과의 신혼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막을 내린 안타까운 요절이었다.

 

1936년 이 해도 홍난파는 변함없이 많은 글을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했고, 대중가요와 신민요의 작곡활동도 계속했다. 이 해 발표된 수필로는 이별의 소야곡」「목멱산하 고토(木覓山下 故土)에서 내 일생을 보내리라」 「레코드 추천 시장」「세익스피어와 음악」「악성(樂聖)의 최후등이 있고, 음악평론으로는 을해(乙亥) 악단을 회고함」「동서양 음악의 비교」「악단 4반세기등이 발표되었다. 또한 연악회에서 특선가요곡집을 간행한 것도 이 해였다.

 

이 중에서 2월에 발표된 목멱산하 고토(木覓山下 故土)에서 내 일생을 보내리라라는 수필은 난파가 결혼을 하고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쓴 글이라는 점에서, 그의 고토(故土)’에 대한 애정과 애착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내 땅을 버리고 어데 가서 살겠단 말씀입니까? 지상낙원이라고 하는 하와이에를 가 봐도 내 땅만은 못했고, 사시를 통하여 백화가 경염(競艶)하는 로스앤젤레스에를 가 봐도 내 땅만은 못했고, 현대문명을 자랑하는 대도시 시카고에 오래 있어 보았으나 자고 깨면 생각이 고향뿐이었고, 지금은 세계적 대도시가 된 동경에도 전후 10여 년을 지내보았지만, 또한 내 땅만은 못하더이다.

 

이 해는 난파의 나이 서른 여덟. 나이 스물이 되던 해에 처음 이국 땅을 밟았던 그에게 지난 18년이란 세월은 시련과 도전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이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그때마다 느낀 것은 내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신념의 재확인이었다.

 

이 점은 난파가 미국 유학길에 오르며 경성을 떠날 때 심안(心眼)에서 솟는 눈물은 육안(肉眼)에까지 뻗쳐 올라와서 두 눈을 적시고, 새삼스럽게도 고국에 대한 애착심과 영별(永別)이나 하는 듯한 비참한 정회(情懷)가 나의 좁은 가슴을 빠개는 것 같았다.”고 술회하면서 쓴 고별의 노래 (ALOHA OE!)또한 이 해 8월에 발표되었다는 사실로도 잘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 해 홍난파에 관한 화제성 기사 하나가 신문지상에 실렸다. 당시로서는 용어조차도 낯설었을 저작권(著作權) 피해에 관한 고소사건 기사였다.

 

부내(府內) 홍파정(紅把町) 이번지의 십육호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洪蘭坡)씨는 수일 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부내 관훈정(寬勳町) 모 출판사의 주인 김명제(金明濟)씨를 상대로 저작권침해에 관한 고소장을 제출하야, 그 검사국에서는 주견(酒見) 검사가 담임하야 방금 사실을 취조 중인데 사건내용은 비밀에 부침으로서 알기 어려우나, 들은 바에 의하면 홍난파씨가 출판한 보통학교 아동용 창가집에 실린 그의 작곡 십여 편을 김명제씨가 작자의 허락도 없이 그가 출판한 창가 책에 무단히 실은 것이라 한다.

 

이 기사에 의하면, 홍난파는 저작권 피해자로서 자신의 작품을 무단 복제한 출판사 측을 고소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피해 보상을 받았는지 어떤 합의를 보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출판의 역사가 일천했던 당시에도 저작권은 엄연히 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른 사람이었으면 몰라도 이미 18살의 나이부터 출판에 관여하기 시작했던 난파로서는 무단복제 행위를 간단히 넘겨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33년 여운형(呂運亨)이 사장으로 취임하며 고친 신문의 제호.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민간 3대지로 운영되었으나, 손기정 사진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정간 처분을 받기도 했다.

 

금메달을 딴 손기정과 동메달을 딴 남승룡(南昇龍) 두 사람을 이름. 이로부터 정확히 56년 뒤인 같은 날 89일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다시 한 번 세계정복이란 신화를 남겼다.

 

홍성유가 세상을 떠난 다음달 9월에는 상록수의 작가 심훈도 장티푸스로 운명했다. 그 역시 이제 막 작가로서의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하던 35살의 요절이었다.

 

홍난파 목멱산하 고토(木覓山下 故土)에서 내 일생을 보내리라<조광> 19362월호.

 

<조선일보> 1936526일자.

  l   회사소개   l   광고안내   l   개인정보취급방침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