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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4/09 09:15:56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42>


지나사변과 '수양동우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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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이후 6년간 중국과 간헐적인 전투를 계속하며 대치해 왔다. 그러나 1937년에 들어오면서 이 세력균형은 일본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류탸오후사건(柳條溝事件)’을 구실로 만주를 침공했던 일본은 이 해 77, 이번에는 루거우차오사건(蘆溝橋事件)’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이른바 중일전쟁(中日戰爭:일명 지나사변)’의 시작이었다.

 

중일전쟁은 만주사변과는 그 성격이나 규모가 다른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승리를 경험한 일본은 당시 운영했던 대본영(大本營)을 다시 설치하고 상시 전시체제로 돌입했다. 이와 함께 국민들에게는 황국사상을 고취하고 황민화(皇民化)운동을 확산시킬 목적에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무렵부터는 그때까지 보류해왔던 사립학교와 기독교계까지도 신사참배에 강제적으로 끌어들였다. 군국주의의 침략정책을 뒷받침할 정신적 통일과 사상적 통제가 시작된 것이다.

 

확실히 1937년이란 해는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도 삶의 체감지수가 달랐다. 일제강점기로 들어선 지도 벌써 27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식민지 지배체제의 고통과 파시즘 전시체제의 통제가 이처럼 피부에 와 닿는 해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서서 온몸으로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불행하게도 홍난파 역시 포함이 되어 있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한 달 전, 국내에서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란 단어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언론을 통해 처음 일반에 알려진 이 단체는 이후 관련된 후속 기사가 연일 보도되면서 차츰 그 전모가 밝혀지지만, 그 구성원과 규모에 사람들은 더욱 이목을 집중시켰다.

 

수양동우회란 안창호가 미국에서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 조직으로, 민족운동단체이면서 항일비밀결사(抗日秘密結社)로도 은밀히 활동하던 단체였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난파는 미국 유학시절 흥사단미주본부에 가입한 뒤, 귀국해서도 현제명 등과 함께 수양동우회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수양동우회의 단원들에 대한 검거령은 69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는데, 일본 경찰에 그 최초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공교롭게도 한 기독교단체의 통지문서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당시의 사건경위를 살펴보자.

 

재경성(在京城) 기독교청년면려회(勉勵會)는 오는 61213일 양일에 금주(禁酒)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전국 35개 지부에 금주운동의 실시를 문서로 지시하였던 바, 동 문서 내에 망국에 함()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 운운하는 문구가 있어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 조선단합회 서기 이양섭(李良燮)이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조선총독부의 문서에 의하면, 경찰이 처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것은 망국에 빠진 민족을 구출하는문구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양동우회의 정체가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포착되고 말았다.

 

민족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의 정체가 발각되어 간부들이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동 사건의 발단은 전월(前月)에 기독교청년면려회가 금주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전국 35개 지부에 발송한 통고문의 내용에 민족운동의 색채가 있다 하여 면려회 본부의 간부가 검거되어 취조 중 수양동우회의 정체가 발각되었으며, 또한 미국선교부에서 조선장로교 교육부 총무 정인과(鄭仁果)에게 송부되어 온 거액의 자금 내용을 수상히 여긴 종로경찰서가 이를 계기로 금일 이광수 주요한 박현환 김윤경 신윤국 한승인 등을 검거하였다.

 

금주운동 전개를 위해 지부에 발송한 통고문이 빌미가 되어 표면화된 이 사건은, 미국으로부터 송금된 거액의 자금까지 출처가 밝혀지면서 마침내 수양동우회의 간부인 이광수주요한 등이 검거되기에 이른다. 이어 10일에는 평양에서 안창호가, 원산에서 조희염(曺喜炎)이 종로경찰서로 소환되어 취조를 받았다. 홍난파가 종로경찰서에 수감된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인 611일이었다.

 

수양동우회사건의 검거 열풍은 해를 넘겨서도 이어져, 19383월까지 이 사건으로 전국에서 체포된 사람은 무려 181명에 달했다. 그러나 19386, 이들 중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사람들의 일부는 나중에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가입하겠다는 성명서를 인쇄해서 각지에 배부하는 등 충성서약을 연출하기도 했다.

 

수양동우회의 간부였던 이광수(李光洙)가 사상전향을 결심한 것도 그해 11월이었다. 예심(豫審)에서 보석으로 풀려나온 이광수 등 28명은 경성에서 모임을 갖고 사상전향 회의를 열었다. 이어 일본군 전몰장병 및 전상자 위령제를 지낸 뒤, 사상전향 진술서를 작성해 재판장에게 제출했다.

 

이들을 포함 기소된 41명에게 2심 선고공판이 내려진 것은 다시 2년이 지난 19408월로, 형량은 이광수가 징역 5, 주요한이 징역 4, 조병옥이 징역 26월의 실형을 각각 선고받았다.그러나 1941년 상고심 공판에서는 원판결에 중대한 사실의 오인이 있다며 사실심리의 재개를 결정했고, 11월에 속개된 최종 선고공판에서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홍난파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2개월 반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수양동우회사건은 막을 내렸지만, 이 사건은 민족운동에 몸 바쳐온 수많은 인사들을 훗날 친일파(親日派)라는 낙인을 찍히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단지 변절이라는 단어 하나로 단죄하기에는 후세의 논리가 너무 극단적이다.

 

모든 일의 결과는 언제나 선택한 자의 몫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방관자의 몫이란, 광복(光復)의 빛줄기 하나 보이지 않던 암울한 시대에서 그들(선택자)이 감내해야만 했을 고통의 세월이 얼마나 길었을까를 헤아려 볼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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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우차오(盧溝橋)는 당시 중국과 일본이 대치하고 있던 베이징 교외의 다리의 이름. 야간훈련 중이던 일본군 1명이 행방불명된 것을 구실로 전투가 시작되어 일본이 선제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양국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시의 천황 직속 최고통수기관. 육군과 해군의 최고사령부 기능을 수행했으며,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존속했다.

 

이광수가 중심이 된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통합해서 1926년 결성된 단체. 1929년에는 다시 흥사단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되었다.

 

④ 「最近ける朝鮮治安狀況조선총독부 경무국 편.

 

<동아일보> 193769일자.

 

⑥ 「最近ける朝鮮治安狀況조선총독부 경무국 편.

 

⑦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편.

 

<매일신보> 194111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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