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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4/16 08:46:54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43>


39살의 악몽-사상 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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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동우회사건으로 611일 종로경찰서에 수감된 홍난파가 반복되는 취조와 갖은 고초를 겪은 뒤 석방이 된 것은 그로부터 72일이 지난 821일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의 모습은, 처 이대형의 표현을 빌리면 몸 전체가 부어 있었고, 벌레에 물리기도 했으며, 입고 있던 옷은 벌레의 배설물로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난파가 체포되어 집을 나설 때 이대형은 만삭의 몸이었다. 따라서 71일 태어난 그의 둘째 딸 홍정임(洪丁姙)의 출생 소식도 유치장 속에서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선의 원로 음악인으로 당시의 음악계를 이끌어가던 홍난파였다. 그러나 일단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자 72일간의 투옥과 고초는 그에게 육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감내하기 어려운 수모를 주었을 것은 확실하다. 더구나 종로 경찰서에 수감이 된 뒤, 난파는 그동안 몸담아왔던 직업을 차례차례로 잃어버리는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경성보육학교 교수직은 물론이고, 이화여전 강사와 빅터 레코드사 음악주임 자리마저도 더 이상은 그가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된 배경에 조선총독부의 압력이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해낼 수가 있다. 이와 함께 난파가 석방될 때는 일본에 협조하는 문예 활동을 해 달라는 권유 아닌 명령을 받았을 것도 분명하다.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심신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난파를 반기는 것은 24살의 아내와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젖먹이 딸이었다. 한동안을 실의에 빠져 지내던 난파가 몸을 추슬러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의 앞에는 이제 자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선택이 될지도 모를 카드 3장이 놓여 있었다. 어느 카드를 집어야 이 가정의 보금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을까, 그는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의 지식인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란 사실상 이 세 가지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 놓인 왼쪽 카드에는 출조(出朝)’라는 글자가 보였고, 가운데 카드에는 은거(隱居)’, 그리고 오른쪽에는 전향(轉向)’이라고 쓰인 카드가 보였다.

 

만일 조선 땅을 떠나 해외에서 민족운동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래서 사상에 구애 없이 예술 창작활동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만일 깊은 산속이나 외딴 오지로 들어가 세상사 잊고 살아간다면, 그래서 소리 없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만일 저들의 말대로 적당히 순응하면서 문예 활동을 하며 살아간다면, 그래서 공들여 쌓아온 음악과 가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면

 

난파는 이 세 장의 카드 앞에서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서서히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의 손이 왼쪽으로 향할수록 이상론이 고개를 들었고, 오른쪽으로 향할수록 현실론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해 8월 한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오후, 그는 오수(午睡)에 잠긴 처자를 잠시 바라본 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피아노 앞에 앉아 떠오르는 악상을 오선지에 옮기기 시작했다.

 

홍난파가 친일단체로 알려진 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에 가입한 것은 이보다 몇 달 빠른 19374월경이었다. 최남선이광수 등이 중심이 되어 문인음악가학자방송관계자 등 30여 명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5월에 정식 발족했다. 처음의 취지는 건전가요운동을 통해 사회 풍습을 교화시킨다는 목적이었지만, 7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는 애국가요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시국가요(時局歌謠) 발표회를 갖기에 이른다.

 

915일 개최된 시국가요 발표회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가요 20여 곡이 선을 보였는데, 이 중에는 최남선이 작사하고 홍난파가 곡을 붙인 <정의의 개가(凱歌)>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이어 930일에는 서울 부민관에서 조선문예회의 애국가요 발표회가 열렸다. 발표곡 중에는 일본인이 작사한 <공군의 노래(空軍)>란 곡이 있었는데, 이 역시 난파가 작곡한 노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홍난파가 곡을 붙인 친일가요로는 이 외에 이광수가 작사한 <희망의 아츰>이란 노래도 있었다.

 

그러나 난파가 전향카드를 선택한 뒤에도 수양동우회의 악몽에서 벗어나기는 쉽지가 않았다. 그는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계속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그들의 경계의 눈초리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그해 114, 난파는 다른 음악가문인목사교육자 등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에게 사상 전향서를 제출하게 된다.

 

무릇 사상 방면의 운동은 그 내용 및 종류 여하에 관계없이 그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시대상과 민중의 마음에 어긋나는 운동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그것에 상응하는 해독을 일으켜서 사회 및 국가의 안녕질서를 어지럽힐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민족적 역사나 문화사적 지위 등을 생각해볼 때, 시대역행의 민족운동 등을 도모하는 것은 민족 전체에 행복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오히려 불행 속으로 빠뜨릴 위험이 있다.

 

생존은 현실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난파는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사상운동이란 불가능하며 성공할 가능성도 없다고 서두를 써내려 간 그의 문장을 대하면, 세월이 지나도 마음이 아프고 차라리 슬프기조차 하다. 또한 누구를 위한 시대역행의 민족운동이냐며 민족 불행론까지 거론한 것을 보면, 그가 총독부로부터 전향의 의사표현 강도를 어느 정도까지 요구받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맹한 적이 있는 필자는, 그 동기여하와 그 활동유무를 막론하고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민중의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차제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사상전향을 결의하고 나의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꿔 과거를 청산하고, 금후는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난파는 수양동우회활동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사상전향을 결의하고, 과거를 청산하고, 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 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리고 국가에 충성하고 민중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다며 전향서의 끝을 맺었다. 이와 함께 5개월간에 걸쳐 체포-수감-석방-감시-전향으로 이어진 ‘39살의 악몽과도 끝을 맺었다.

 

그러나 이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그가 지불한 대가는 너무 컸다. 그것은 황국(皇國)’의 미몽에 빠진 일제가 전쟁의 수렁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전향(轉向)’이란 마수에 걸린 그의 발목을 붙잡고 계속해서 놓아주질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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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思想轉向いての論文)19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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