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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4/23 08:50:33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44>


전향한 조선의 원로음악가가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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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가 사상전향서를 제출하고 나서야 다시 찾은 일터는 경성방송국이었다. 이미 오랫동안 경성방송국과 인연을 맺고 있던 난파는 비로소 이곳의 양악부 책임자로 취업을 할 수가 있었다. 동시에 경성방송관현악단의 지휘자로도 정식 취임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관현악단인 경성방송관현악단은 한해 앞서 1936년 창단이 되었는데, 이때 창단작업을 하면서 지휘봉을 잡은 것도 홍난파였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홍난파가 지휘봉을 처음 잡은 것은 19236월 정동 계명음악원 주최의 합창곡 발표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9277월에는 중앙악우회관현악단을 지휘해서 처음 경성방송국과 인연을 맺었고, 1934년부터는 JODK 전속인 경성관현악단을 지휘해 왔다.

 

경성방송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한 난파는 곧 이어 악단의 정비에도 착수해서 단원 수도 20명 정도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규모는 나중에는 40명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당시 난파와 함께 호흡을 맞추던 연주자로는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악장(樂長)직을 맡았던 김생려(金生麗), 피아니스트인 이흥렬(李興烈), 그리고 첼리스트 김태연(金泰淵) 등이 있었다.

 

물론 방송관현악단이라고는 해도 이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그것도 한정된 시간에 한해서 연주활동을 했기 때문에 일반음악회의 연주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특히 초창기에는 연예 오락방송 등의 유행가 반주에 동원되는 일도 많았던 탓에 당시 최고의 연주자들로서는 적지 않은 불만도 있었던 듯하다.

 

홍난파가 이 해 연말 새로운 실내연주 악단을 만든 배경에는 이러한 이유도 포함이 될 것이다. 1222일 경성에서 공식 출범한 성서(城西) 트리오는 홍난파이흥렬김태연의 세 명으로 구성이 되었다. 여기서 성서란 경성의 서쪽을 의미하는데, 당시 홍난파가 살고 있던 집의 행정구역상의 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바로 한해 전 조카 홍성유를 잃고 난파 트리오를 해체해야만 했던 난파로서는 실내악 연주의 무대가 없어진 것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서 트리오는 그 공백을 메워줄 연주무대로서도 꼭 필요했던 것이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난파 트리오가 세 명의 바이올린 주자로 구성된 바이올린 3중주단이었던 것에 비해, ‘성서 트리오는 바이올린첼로피아노로 구성된 실내악단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무대에서의 연주활동은 물론, 매주 한번은 경성방송국을 통해서도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이를 통해 당시의 음악 애호가들은 아쉬운 대로 감미로운 실내악의 선율을 감상할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해마다 신문과 잡지 등에 왕성하게 글을 발표하던 홍난파였지만, 이 해는 그의 글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물론 앞에서 말한 ‘39살의 악몽을 겪은 해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가 수감되기 이전인 6월까지는 평론 가정과 음악2~3편의 글이 보이지만, 그 이후에는 그가 단 한편의 글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한 것은 12월로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조선일보>리스트의 국제적 연애6회에 걸쳐 연재한 그는 <여성> 12월호에 재미있는 실내 유희법, 그리고 <조광> 12월호에는 정원(庭園)의 실패-나의 1년 총결산이란 수필을 실었다.

 

그런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때 그가 발표한 글들은 음악세계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다소 엉뚱스럽기까지 한 글들이었다.

 

먼저 리스트의 국제적 연애는 헝가리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리스트(Franz von Liszt)가 연주여행 중에 조우한 화려한 여성편력을 소개한 글로써, 누가 언제 다루어도 상관이 없을 천재 음악가의 러브스토리였다.

 

재미있는 실내 유희법은 이보다 한술 더 떠서 음악과는 전혀 무관한 글이었다. 이것은 연말 모임 등에서 여러 사람이 손쉽게 즐길 수 있는 놀이를 소개한 것인데, 바꿔 말하면 홍난파가 제안하는 실내놀이 10정도라고 설명하면 알맞은 표현이 될지 모르겠다. ‘반지 돌리기’ ‘이름 부르기’ ‘의자 뺏기등 놀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글 역시 굳이 홍난파의 이름을 빌려서까지 실을 필요는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이 해 연말 홍난파는 왜 이런 글들을 쓴 것일까. 아마도 이전처럼 난파는 여러 곳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것이고, 절필선언을 하지 않은 이상 무엇인가는 써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직면한 글을 쓰자니 총독부의 검열이 신경에 쓰였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이 있었다. 더구나 불과 한 달 전 전향서를 제출한 난파로서는 섣불리 글쓰기가 두렵기조차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정원의 실패란 글에서도 금년 1년은 별난 성패가 없습니다. ××에 다녀온 것밖에 특기할 만한 것이 없군요.”라고 서두를 꺼낸 뒤, 정원의 나무가꾸기에 자신의 심경을 빗대서 지난 1년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란 물론 그가 수감생활을 한 종로경찰서 유치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난파는 홍파동으로 이사를 온 뒤, 바위 집터에다 정성껏 나무를 심고 화초도 가꾸어 아담한 정원을 꾸며 놓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에 가게 되고 아내는 입원하게 되어, 몇 달 동안 물을 주지 못한 까닭에 나무들이 모두 죽었군요.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중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말라 죽고, 작년에 심었던 나무만 남아 있어서 꿈까지 꾸었지요. 꿈에는 내가 좋아하던 나무가 다시 살아나서 잎이 돋고 가지가 치는 것을 보았죠. 꿈에라도 퍽 좋아했습니다. 내년에는 다시 그 나무를 심겠습니다. 그리고 성공한 이야기는 별로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금년은 나에게 그리 복된 해가 아니었습니다.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난파가 부재중이던 72일간 그가 애써 가꾸어온 암정(岩庭)’은 황폐화되고 말았다. 그것도 그가 가장 좋아하던 나무가 말라 죽고만 것이다. 위 글의 논리를 좀 비약해 보면, 그 나무의 죽음이란 다름 아닌 석방 뒤 사상전향을 해야만 했던 난파 자신의 허탈감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내년에는 다시 그 나무를 심겠다는 표현은 일제의 마수로부터 반드시 벗어나고 싶다는 심중의 의지를 완곡하게 내비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좌절에 빠진 조선음악계의 원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목(枯木)의 환생이 아니었다. 각종 친일 단체는 그를 더욱 필요로 했고, 그 역시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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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영변 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1912~1995).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방송관현악단 시절부터 홍난파와 인연을 맺었다. 해방 이후에도 관현악단의 창단과 지휘자로서 많은 역할을 했다.

 

함경남도 원산 출생의 피아니스트, 작곡가(1909~1980).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해서 음악교사로 활동했다. 이 동안에 <어머니의 마음> <바위고개> <섬집아기>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군가인 <진짜 사나이>도 그의 작품이다.

 

③ 『한국방송70년사한국방송공사, 1997

 

홍난파 정원(庭園)의 실패-나의 1년 총결산<조광> 1937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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