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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4/30 09:29:08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45>


난파의 음악백과 <음악만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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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7월에 발발한 중일전쟁은 그해 12월로 들어서자 마침내 일본군이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南京)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수많은 중국인 포로와 일반시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로도 불리어지는 이 사건은 20만 명 이상의 무고한 희생자를 내면서 해가 바뀐 19381월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 참극은 당시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가 않았다.

 

이렇듯 중국에서의 전황(戰況)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며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지만, 후방에서는 매서운 추위가 물러날 때쯤이면 전쟁도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다가오는 봄을 기다렸고, 식민지 지배체제 하에서 익숙해진 자신들의 생업과 삶에 충실했다.

 

이 해 2월 경성의 풍경은,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하나를 보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는 가늠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조선서 처음 되는 대중연예의 총동원의 밤이라<매일신보>가 자신만만하게 소개한 이 글은 자사(自社)가 주최한 대중연예의 밤안내장이기도 했다. 얼마나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기획이었는지 이날의 대청중을 흥분과 도취의 대전당으로 휩쓸게 할 것이라며 온갖 기대감을 부추기고까지 있다.

 

(22일과 23) 이틀을 두고 정각인 오후 일곱 시에 개연(開演)이 되면 먼저 20 가까운 ‘DK오케스트라’(방송국 관현악단)의 도도한 멤버가 홍란파(洪蘭坡)씨 지휘 아래 다섯 개의 찬란한 곡목을 연주하게 된다. 그리고 곧 계속되는 한성권번(漢城券番)과 조선권번(朝鮮券番) 댄싱팀(무용단)이 가벼운 의상에 연연한 몸맵시로 무용을 하게 되는데, 이 무용에는 우리의 정서를 한없는 남쪽으로 이끌고 가는 아리랑을 비롯하여 연락선은 떠난다’ ‘왕서방의 연문등 코미디를 가미한 가벼운 춤이 보여지며, 그 다음에는 조선의 고전예술이라 할 창극조(唱劇調)가 조선의 명창인 이동백(李東伯) 송만갑(宋萬甲) 두 분과 여류명창 김연수(金鍊守) 박록주(朴錄珠) 등 두 분이 가락도 늘어지게 노래할 것이다. 그 다음이 유행가(流行歌)로 이 프로에는 포리돌’ ‘컬럼비아’ ‘빅타3대 레코드 회사의 전속가수가 총동원이 될 것이니, 누구누구가 무슨 노래를 어떻게 한다고 하는 것은 당분간 비밀에 부쳐두기로 한다.

 

이 무대에는 홍난파가 지휘하는 경성방송관현악단까지 참가해 연주를 담당했다. 실로 도도한 멤버들이 총출동했으니 그 열기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더구나 기생들의 댄싱창극(唱劇)유행가가 이어지고, 2부에서는 만요(漫謠)촌극(寸劇)기생 가요대회까지 펼쳐졌으니 그야말로 초호화 무대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대중들은 스타들의 화려한 춤과 노래, 선율과 율동에 열광했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민족과 사상을 잊을 수 있었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논리로부터도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이것은 또한 조선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를 강조하는 일제의 목적과도 부합되었으므로 대중연예란 오히려 권장되기조차 했던 편리한 사상통제 수단이었던 것이다.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와 관련해서, 일제는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라는 친일 문화단체를 조직해 놓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상 전향자들의 선도와 계몽에 목적을 두고 있었지만, 중일전쟁 이후에는 내선일체에 의한 동아주의(東亞主義)를 표방하면서 시국강연에 주력했다.

 

홍난파가 현제명전영택 등과 이 단체에 참가한 것은 1년이 지난 1938년이었다. 사상전향자란 멍에를 짊어진 난파로서는 그 참가 경위야 어떠했든 간에, 결과적으로는 나이 마흔이 되어 또 하나의 불명예스런 훈장을 달고 말았다.

 

그리고 4월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난파는 10개월 가까이 떠나있던 교직에 가까스로 복귀할 수가 있었다. 경성음악전문학원이 이 해 처음 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교수가 된 난파는 다시 생활을 안정을 되찾으며 문필활동도 재개했다.

 

그 첫 번째 결실이 710일 영창서관에서 간행된 음악만필(音樂漫筆)이었다. 난파는 1934년부터 <동아일보>음악야회(音樂夜會)라는 음악수필을 틈틈이 연재하고 있었는데, 음악만필은 이 글들과 함께 그동안 기고한 글들을 모아 엮은 산문집이자 평론집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만필(漫筆)’이란 제호에서 보듯이, 이제까지 보던 음악서적과는 그 성격이 매우 특이한 출판물이었다. 특정 장르의 구별이 없이 음악에 관한 내용을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써서 엮은 책이었다. 그래서 신문의 서평기사 역시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소개했다.

 

본서는 이른바 창작도 번역도 논문도 수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문학서도 순수한 음악서도 아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창작으로도 번역으로도 읽을 수 있고 또 문학서로도 순수한 음악서로서도 읽을 수 있는데, 그 안에는 논문도 수필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본서의 특색이고 가치인 것이다.

 

난파 자신도 서문에 이 책의 자체를 놓고 생각할 때에 이것이 본시 뼈도 없고 줄기도 없는 말하자면 창작도 아니요, 번역도 아니요, 논문도 아니요, 수필도 아니요, 그렇다고 문학서도 아니요, 순수한 음악서도 아닌 일종의 악의(惡意) 없는 붓장난이라고 쓴 것을 보면, 스스로 이 점을 충분히 의식하고 출판했음을 알 수 있다.

 

악의 없는 붓장난의 내용은 재미있는 음악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음악이론」 「한시한필(閑時閑筆)」 「노변백담(爐邊百話)」 「악성연사(樂聖戀史)」 「광상소곡(狂想小曲)그리고 자신의 미국유학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난파의 음악백과>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좋을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했다.

 

더욱이 음악을 테마로 한 러브스토리와 유머, 그리고 재미있는 일화까지 소개하고 있으니,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감명을 선사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은 발매되고 나서 큰 인기를 끌어 많은 부수가 팔리기도 했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이 음악만필의 간행은 난파가 생전에 출판한 마지막 저서였다는 점이다. 그는 생전에 20권에 가까운 저서를 출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1618살의 나이로 통속창가집을 발간하며 시작된 그의 출판활동은 이후 22년간이나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 가지 추가를 한다면, 난파가 이해 한 해 동안 매월 잡지에 연재한 글이 있었다. 월간 <소년>소년음악독본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했는데, 1월호에 영웅교향곡을 시작으로 총 12회를 연재했다. 이 글들도 나중에 세계의 악성(樂聖)이란 단행본으로 출판이 되었지만, 그것은 난파가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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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으로, 조선시대에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서울에는 한성권번(漢城券番)대동권번(大東券番)한남권번(漢南券番)조선권번(朝鮮券番) 등이 있었고, 지방도시에도 각각 권번이 있었다. 권번에서는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매일신보> 1938219일자.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김재훈(金載勳)1938년 설립한 음악전문 교육기관. 김재훈은 원장직도 맡아 5년간을 이끌어갔지만 1942년 폐교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19387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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