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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5/07 09:02:52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46>


마지막 불꽃 ‘주피터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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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6월 서울 부민관 대강당에서는 1회 전조선 창작 작곡 발표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동아일보사 주최로 68일과 9일 이틀간에 걸쳐 열린 이 음악제는 1930년대의 국내 창작 음악계를 총결산하는 의미 있는 무대이기도 했다. 이미 1933년 현제명과 함께 국내 최초의 창작곡 작품발표회를 개최한 바가 있는 홍난파는 이 음악제에서 한국음악사에 또 하나의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난파는 이 해 두 곡의 관현악 작품을 완성했는데, 이것은 국내 최초의 관현악곡이었고, 그것을 처음 선보인 무대가 바로 전조선 창작 작곡 발표회였다. 그 중의 하나인 <관현악 조곡(Orchestral Suite)>은 첫날 마지막 순서로 난파 자신이 지휘하는 경성방송관현악단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1악장 즉흥곡2악장 론도/3악장 동양풍의 무곡3부분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그동안 바이올린 독주곡들을 작곡해 오던 난파가 마침내 기악곡시대의 문을 여는 순간이기도 했다.

 

발표회의 둘째 날에 선보인 또 다른 하나는 <나그네의 마음>이란 타이틀이 붙은 곡으로, ‘고향 생각’ ‘옛 동산에 올라’ ‘그리움등을 테너 최창은이 부르고 홍난파의 지휘로 경성방송관현악단이 연주한 관현악부 독창 모음곡이었다.

 

전조선 창작 작곡 발표회는 그 이름에 걸맞게 당시 조선의 기라성 같은 작곡가 박태준김재훈박경호김성태채동선임동혁김세형김메리이흥렬안기영 등이 참가해 자신들의 작품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이 해 홍난파를 그 어느 때보다 가슴 벅차게 만든 것은 작곡가홍난파로서보다는 지휘자홍난파로서의 감격스런 성취감이었다. 그것은 무더위가 점차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723일 밤의 일이었다.

 

이날 밤 JODK 2방송에서는 홍난파의 지휘로 경성방송관현악단의 클래식 연주가 전파를 타고 흘러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연주되던 음악은 지금까지 들어오던 실내악이나 클래식 소품이 아니었다. 웅장하고 위엄이 있고, 그러면서도 고전적인 형식미를 갖춘 교향곡 연주가 30분 동안이나 이어졌다.

 

당시 이 음악이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1C장조, 일명 <주피터 교향곡>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들은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는 중요하지 않다. 또 평소 음반을 통해서나 일본으로부터의 중계방송 등으로 명연주에 귀가 익숙해진 청취자들이, 이 방송을 듣고 다소 미숙했을 연주에 실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연주를 통해서 홍난파를 그토록 감격하게 만든 것은 조선에서 최초로, 조선인들의 손으로 교향곡 전 악장을 연주했다는 뿌듯한 성취감이었다. 그것도 30명이 채 못 되는 소수의 단원들이 열악한 환경을 극복해 가며 일궈낸 성과였기에 그 기쁨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13만 여의 방송 청취자에게 있어서는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또는 당연한 일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방송 사업의 역사가 있은 지 10여 년, 그리고 방송 관현악단이 생긴 지도 4, 5년이나 된 오늘에 교향곡의 전곡 연주란 이것이 처음일 뿐만 아니라, 극히 소수의 멤버로 이 역사적 연주를 결행한 이면에는 제3자로서 헤아리지 못할 온갖 고심과 노력과 감격이 숨어 있었음을 우리는 눈물겹게도 잘 기억하고 있다.

 

방송의 역사가 10년이 넘도록 교향곡 하나를 제대로 연주할 수 없는 현실은 방송 음악에 몸담고 있는 난파로서는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껏 관현악단이 있다고는 하나 가까운 일본과만 비교해 보아도 그 인적 구성이나 재정적 규모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70만 시민이 사는 문화적 대도시라고 자랑하는 경성에 교향악단 하나 없다는 것은 조선의 체면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동경 신교향악단과 만주 하르빈교향악단의 내한 연주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만보고 있을 것인가.

 

난파가 경성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복귀한 뒤 1년 반 동안, 그는 조선 유일의 이 관현악단을 이끌어가면서 장차 80명 정도의 교향악단으로 키울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결실로써 이날 밤의 역사적 연주를 결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난파가 말한 3자로서 헤아리지 못할 온갖 고심과 노력이란 무엇이었을까.

 

백도에 가까운 염열(炎熱), 더구나 밀폐된 방음장치 실내에서의 30분간의 연주란 생각만 해도 고한(膏汗)이 흐르지마는, 그러나 우리의 고행은 염열에 있음도 아니었고, 공기의 유통이 없는 외계와의 차단에도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충실하고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해 보겠다는 것이 20여 단원의 일맥상통된 기백이었다. 관현악단의 연주란 언제나 그리해야 될 것이지마는, 이날 밤 우리는 다 각각 자아를 죽이고 혼연일체가 되어서, 어떤 일개의 창조물을 완성하기에 심혈을 다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방송국의 연주 무대란 당연히 방음장치로 밀폐된 공간이었고, 한여름에도 냉방시설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단원들을 긴장시킨 것은 완벽에 가까운 연주에 대한 부담이었다. 난파의 표현대로, 다행히 이날 밤 이들은 각각 자아를 죽이고 혼연일체가 되어연주한 덕분에 실력 이상의 열연이라고 자긍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일말의 아쉬운 심정은 숨길 수 없었는지, 그는 몇 달 뒤 발표한 글에서 독자 여러분은 이것을 자화자찬이라고 웃어버리시라.”는 표현으로 당시의 감동을 멋쩍게 마무리했다.

 

홍난파의 길지 않았던 음악인생에서 볼 때, 이날 밤 그가 혼신의 열정을 쏟아 단원들과 함께 일궈낸 <주피터 교향곡>의 완주(完奏)는 그의 만년을 다시 한 번 음악 속에서 타오르게 한 마지막 불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해 여름, 마흔 한 살의 홍난파는 자신의 음악 열정이 식지 않았음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시 영화음악에 참여한다. 이미 4년 전 영화 <춘향전>의 주제가를 작곡했던 난파는 9월에 개봉된 영화 <애련송(愛戀頌)>에서도 제1주제곡인 서곡과 제2주제곡 방랑곡을 작곡했다. 뿐만 아니라 스크린 속의 주인공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곡을 직접 연주해서 삽입하기도 했다.

 

영화 <애련송>은 동아일보 시나리오 현상공모에 당선된 최금동(崔琴桐)환무곡(幻舞曲)을 영화화한 것으로, 유치진이해랑김동원 등 당시 지식층 연기인이 총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작품이었다.

 

난파는 이 영화의 작곡과 연주로 직접 참여하면서 평소 자신이 주장하던 영화음악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피력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신문지상 등을 통해서 주장하고자 했던 요지는 영화제작자들의 음악적 효과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였다.

 

그 결과 사용되는 음악이 되레 극적 감동을 반감시키는 역효과까지 불러일으키는 데도 음악 쪽에 대한 예산은 언제나 제작비의 2~3%에 불과했다. 발성영화가 도입된 지 이미 4, 조선 영화계의 안타까운 현실을 지켜보며 그가 분노하고 개선책을 강조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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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현악으로 연주하도록 만든 조곡(組曲), 즉 모음곡을 말한다. 여러 성격의 무곡(舞曲)들로 구성하거나 가극발레연극음악 따위를 추려서 묶기도 한다.

 

홍난파 지휘자의 감명<문장> 193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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