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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5/14 09:31:18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47>


멍에인가 불명예 훈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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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의 군화 발자국 소리가 갈수록 요란해지는 가운데,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1930년대도 소리 없이 저물고, 다시 해가 바뀐 19401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제 막 음악가의 길로 들어선 젊은 청년 하나가 눈 덮인 홍파동 언덕 홍난파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연말 동아일보사 주최 신춘문예 작곡 부문에 당선된 나운영(羅運榮)으로, 음악부문 심사위원장이었던 홍난파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왔던 것이다. 이 날 그가 홍난파로부터 들은 말은 외국에 가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하여 민족음악을 창조함으로써, 손기정 선수처럼 비록 나라는 빼앗겼어도 민족의 이름을 온 세계에 빛내라.”는 간곡한 당부였다.

 

때는 일제 말기인지라 난관이 많았지만, 나는 이에 용기를 얻어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국 작곡을 전공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민족적 아이디어와 현대적 스타일이 결부된 민족음악 창조의 길을 꾸준히 달리게 된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훗날 나운영이 밝힌 회고담으로, 그는 이때 난파의 당부에 용기를 얻어 바로 두 달 뒤 일본유학을 떠가게 되고, 작곡가로서 수많은 명곡을 남길 수가 있게 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협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섰던 난파였지만, 그가 내심 어떤 음악관을 갖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난파는 이 해, 그의 친일(親日)’ 논란과 관련해서 가장 빌미의 소지가 되는 두 가지 글을 신문에 게재함으로써, 20여 년간 공들여 쌓아온 화려한 음악인생에 아쉬운 오점을 남기게 된다.

 

194077일은 중일전쟁(지나사변)이 발발한 지 3년이 되는 날로, 이날 신문지상에 실린 글은 거의가 지나사변과 관련된 기사 일색이었다. 당시 <매일신보>의 객원기자이기도 했던 난파도 이날 신문에 칼럼 기사 하나를 게재했다. 그러나 매체가 총독부 관할의 <매일신보>였다고는 하나, 그래서 굳이 지나사변과 음악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고는 하나, 아래의 인용된 부분을 읽어보면 총독부의 정책에 그대로 동조해서 씌어진 문장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가 있다.

 

성전(聖戰)도 이제는 제3계단에 들어가서 신동아(新東亞) 건설의 대업(大業)(……) 더욱 견실하게 실현되어 가는 이때에 후방에 있는 여러 음악가와 종군했던 악인(樂人)들의 뇌리에는 용용히 넘쳐흐르는 감격과 (……) 감흥이 감발(感發)해 갈 것인 즉, 이번의 성업(聖業)이 성사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할 때에 그 서곡으로, 그 전주적 교향악으로 음악 일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낼 날이 1일이라도 속히 오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이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음악보국운동에 매진할 것을 마음속에 스스로 기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위의 글에서 성업(聖業)이 성사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하는 일은 황국신민화사상의 발로이고, 조선 음악이 음악 일본으로 슬며시 바뀐 것은 내선일체사상의 표현일 수도 있다. 또한 음악보국운동에 매진하자는 것이 음악을 통한 성전(聖戰)의 독려를 의미한다면, 이것들은 모두 총독부의 정책과 일맥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난파의 가식적 표현이었는지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일본인들이 늘 하는 습관대로, ‘혼네(本音:본심)’를 숨기고 다테마에(立前:겉모습)’의 처세술로 썼을 수도 있다. 또 그날의 분위기가 그랬으니까 알아서 썼을 수도 있고, 사전 청탁을 받은 대로 피할 수 없는 중압감 속에서 붓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었다고 해도 지나사변과 음악은 이제까지의 난파로부터는 훨씬 떨어진, 너무나 멀리 떨어진 충성문(忠誠文)이 되고 말았다.

 

또 한 편의 글은 91, 같은 <매일신보>에 실린 조선영화와 음악이란 음악논평 기사였다.

 

가뭄에 콩 나는 식으로 일 년에 한두 개씩 나오는 조선영화를 볼 때마다 언제나 느끼는 불만은 그 편집의 무정제와 정도에 지나친 슬로우 모션에도 있지마는, 보다 더 반주음악의 빈약에 있어서 우리는 더 한층 이것을 통감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다 같이 수긍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조선영화와 음악은 제목에서 보는 대로 조선영화가 제작상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특히 음악과 관련해서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일종의 영화음악 제작론이라고 해도 좋을 이 글은 위에서 본 충성문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글이 다시 문제가 된 것은 필자의 이름란에 모리카와 준(森川潤)’이란 일본식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파 자신도 이 점을 우려했음인지 그 옆에 (舊名 洪蘭坡)라고 자신의 이름을 덧붙였다.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란 논란의 소지를 남기는 단초가 되는 부분이었다.

 

창씨개명은 단어 그대로 성()을 새로 만들고[創氏], 이름을 바꾼다[改名]는 뜻이다. 내선일체와 황민화 정책의 연장선에서 일제는 이해 211일부터 810일까지 모든 조선인의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로 바꿀 것을 명령한다.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이해 6개월간에 걸쳐서 실시된 창씨개명은 초기에는 신고가 저조했지만, 일제의 강압에 의해 결국 거의 대부분의 조선인이 일본식으로 자신의 성을 바꾸고 말았다. 이 점은 홍난파 역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창씨는 누구나 꼭 해야 하는 의무사항이었지만, ‘개명은 원하는 사람만 해도 좋은 선택사항이었다. 창씨는 강제조항이었고, ‘개명은 임의조항이었다. 더구나 창씨는 신고만 하면 되었지만, ‘개명은 절차를 밟아 수수료까지 내야 했다. 이것은 당시 창씨와 개명을 모두 한 사람이 10% 정도에 머물고 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실제로 현제명은 구로야마 사이민(玄山濟明)으로, <봉선화>를 불렀던 김천애는 다츠미야 텐아이(龍宮天愛)창씨만 한 것을 보아도 이 점은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면 왜 난파는 森川蘭坡또는 森川永厚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모리카와 준(森川潤)’으로 개명까지 했을까. 이 점 역시 홍난파의 친일과 관련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또한 지나사변과 음악이란 글과 함께 그의 행적에서 의문부호로 남겨져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 가지 추측을 해 본다면, ‘창씨만 한다고 해도 결국은 창씨개명을 한 것이 되므로, 차라리 그 나름의 일본식 예명을 만들어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의문은, 일본식 이름 모리카와 준은 이 조선영화와 음악이란 글에서 단 한 번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어떤 사정에 의해서 그가 이 필명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때의 이름표기 하나만 가지고 그가 창씨개명을 함께 했다고 예단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주장역시 그래서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는 것이다.

 

그러나 1940년 이 해 난파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든 일은 형 홍석후의 죽음이었다. 낙엽이 차곡차곡 쌓이던 만추의 계절, 난파가 세상에서 가장 의지해 왔던 홍석후는 111757세의 나이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난파에게 있어 부모 이상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재정적 후원자이기도 했다. 난파가 고향 남양의 활초리를 떠나 서울 정동에 둥지를 틀게 해준 것도 그였으며, 신앙과 음악의 세계로 난파를 이끌어준 것도 바로 형 홍석후였다. 또한 일본과 미국 유학시절, 그리고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올 때 역시 보증을 서며 방패막이 되어준 사람은 홍석후 그 한 사람뿐이었다.

 

주위에서 사랑하던 사람들을 몇 차례나 잃고 비통에 빠졌던 난파였지만, 이때만큼 혈육과의 이별에 가슴 아파했던 일이 또 있었을까. 기록상에 남아있는 홍난파의 마지막 글이 홍석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매일신보> 116일자에 실린 기타의 음악적 지위였다는 사실은, 홍석후 사후(死後) 난파가 어떤 심경 속에서 지냈는가를 설명해주는 반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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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생의 작곡가(1922~1993). 고교시절 <가려나>로 신춘문예 작곡부문에 당선 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帝國)고등음악학교 졸업. 귀국 후 작곡활동에 전념했고 연세대학교 음대 교수와 음대 학장 등을 역임했다.

 

나운영 양악 150년사-악성(樂聖) 홍난파

 

홍난파 지나사변과 음악<매일신보> 194077일자.

 

홍난파 조선영화와 음악<매일신보> 194091일자.

 

창씨를 하지 않는 집안의 자식은 각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이 거부되었고, 그 호주는 비국민으로 취급되어 일체의 공직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경찰의 사찰대상은 물론 노무징용의 우선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특히 증명발급이 거부되고 심지어는 식량 배급대상에서까지 제외시키는 등 갖은 사회적 제재를 가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발표대로라면 창씨개명은 100%이다. 이의 근거로서 일본에서는 결혼을 하면 여자가 남편 성을 따르므로 남편이 창씨개명을 하면 그 처는 자동적으로 남편 성씨로 바뀌었고, 또 일본에도 있는 성씨인 (미나미), (하야시), (야나기) 등은 성을 바꾸지 않고도 자동 처리되었으므로 거의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다면 고관대작 출신이었다거나, 호적이 없는 부랑자였거나, 독립운동 등으로 국내외 등에서 신분을 감춘 사람들일 것이다.

 

신도성 홍난파 바로알기<화성오산신문> 200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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