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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5/21 10:39:54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48>


암흑 속에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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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1년 뒤인 19409월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삼국군사동맹(獨伊日 三國軍事同盟)을 맺으면서 전쟁은 전 세계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한편 3년째 중일전쟁의 수렁에서 고전하고 있던 일본에서는 1941년에 이르자, 이의 타개책으로 마침내 미국과의 일전까지 불사하며 아시아 남진론(南進論)’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국주의 팽창 논리에 발맞추어, 국내에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각종 단체가 잇달아 결성되었다. 19411월에 결성된 조선음악협회도 그 중의 하나로, 음악을 통해 보국(報國)’하자는 목적에서 조직된 친일단체였다.

 

현제명과 김원복 등 5명의 조선인과 13명의 일본인이 이사(理事)를 맡았고, 홍난파와 김세형 등 5명의 조선인과 16명의 일본인이 평의원으로 재직했다. 난파로서는 생애 마지막으로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멍에였다.

 

이 해 3, 난파는 장녀 홍숙임을 출가시켰다. 딸은 8살 어린 나이에 모친 김상운을 잃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어느덧 23살의 어엿한 숙녀로 변신해 있었다. 또한 그가 일본 유학길에 오르던 스무 살에 얻은 첫딸이었으므로 그 감회는 더욱 남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장녀를 출가시키고 맏사위를 얻은 기쁨도 잠시, 난파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늑막염이 다시 재발되는 바람에 바로 다음 달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고 말았다.

 

특별한 질병 없이 비교적 건강 체질이었던 난파였지만, 이 늑막염 한 가지만은 지난 10년간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불청객처럼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난파가 처음 늑막염을 앓게 된 것은 19314월경이었다. 조카 홍옥임이 돌연 자살을 하자 그 충격에 빠져 밤낮 없이 거리를 방황한 적이 있는데, 이때 찾아온 늑막염으로 10여 일 정도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미국유학 중 자동차 사고로 늑골을 다쳐 역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 병마는 난파가 귀국한 이듬해인 19345, ‘15을 해내며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그를 또 다시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도 그는 오뚝이처럼 일어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1937수양회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난파는 이 악마의 질병과 또 한 번 마주쳐야만 했다. 몸서리쳐지도록 끈질긴 악연(惡緣)이었다. 그래도 그는 또 다시 일어서서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 방송관현악단을 2년 이상이나 이끌어왔는데, 이해 4월 그만 또 다시 병상에 눕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적십자병원 병실에서도 난파는 현역 복귀만 생각하며 퇴원 날짜를 꼽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동료인 박경호에게 425일 보낸 편지에 의하면 지금의 형편 같아서는 내달 중순경이나 되어야 퇴원할 것 같으므로, 이번 음악보국주간에는 작품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어쩌면 이 서신은 그가 썼던 마지막 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난파는 그 다음 달 병원을 나와 홍파동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퇴원이 아니라 자택에서의 요양을 허가받은 것에 불과했다. 결국 그 해 715일 악화되는 병세를 견디지 못한 난파는 동대문 밖 휘경동에 있는 경성요양원에 재입원되고 말았다.

 

그러나 수개월에 걸친 치료의 보람도 없이, 경성요양원에서 한 달 이상을 입원하고 있던 난파는 마지막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30일 오전 11, 가족과 친지, 그리고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4살 난 딸의 재롱이 눈에 밟혀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승에 머물고 싶어 했을 43살의 아까운 나이였다.

 

난파의 유해는 이틀 뒤인 91, 그가 평생을 몸담아 왔던 새문안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火葬)해 달라던 그의 유언에 따라 서대문 밖 화장장(火葬場)에서 타오르는 연기와 함께 재로 변했다.

 

그때 사람들은 보았을 것이다. 그가 마침내 고통과 멍에를 벗고, 마침내 암흑의 광야에서 찬란한 빛줄기를 타고 하늘나라로 오르는 것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기억추억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남겨 놓은 채.

 

기억중 하나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난파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 쓴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러면 고토(故土) 안에서는 어디가 제일 살고 싶은 곳이냐는 말씀이지요? 같은 서울 안에선들 일생을 동동 동번지 동문(同洞 同番地 同門) 안에서만 살지는 못하는 이상 어딘들 싫다 하오리까마는 그래도 원산지만은 떠나고 싶지를 않습니다. 그래 목멱산이 내 집 앞산이요, 한강이 내 집 앞물일세. 이 집, 이 산, 이 강을 떠메고 가지 못할 바엔 나는 서울서 화토(化土)하고 말겠습니다.

 

난파는 자신이 말한 대로, 목멱산이 있고 한강이 흐르는 서울에서 흙으로 돌아갔다. 그는 묘비 하나 남기지 않고, 음악 열정에 평생을 불태웠던 자신의 삶처럼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사라졌다.

 

난파가 세상을 떠나고 20여 일이 지난 뒤, 그의 동갑내기 친구였고 음악의 동반자였던 박경호는 신문에 이틀간에 걸쳐 장문의 조사(弔辭)를 실어 난파의 추억을 되새겼다. “형은 너무 일찍 갔소.”로 시작되는 박경호의 조사는 난파의 죽음을 애도한 뒤, 음악가 홍난파의 삶과 예술을 추모했다.

 

아마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약27, 8년 전인 듯하오. 내가 음악학교에 재학시 예배당 찬양대에 끼어 종교예배당에서 열렸던 음악회에 갔었던 기억이 새롭소. 그때에 형은 바이올린으로 슬라브의 자장가를 독주하고 앙콜을 하니까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를 켰소. 나는 그때 평양서 서양 선교사들이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별로 감심(感心)을 하지 않았었소. 그러나 이 음악회에서 형의 독주를 듣고야 비로소 바이올린이란 어떤 악기인지 짐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이오. 이것은 나 한 사람뿐이 아니었을 것이오. 당시의 바이올린이란 조선인에게 매우 희한한 악기였고, 또 바이올린을 감흥 깊게 켤 수 있는 이가 형 한 사람뿐이었소.

그러므로 형은 그때에 조선에서 바이올린의 사도(使徒)이었소. 아마 형의 바이올린은 무동(無動)한 청년의 마음을 찌르고 아로새긴 것이오. 30년 후 오늘에 와서, 또는 무한한 장래에 있어서도 조선에서의 바이올린 음악이 발흥하는 예술적, 영적(靈的) 대과 등에는 반드시 형의 업적이 잠재하였을 것이오.

 

박경호가 홍난파의 바이올린 연주를 처음 접한 것은 1914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 해는 16살의 소년 난파가 신기한 악기를 들고 전국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아 순회연주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30년 가까운 우정도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러나 박경호가 홍난파를 남달리 숭모(崇慕)한 이유 중의 하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사비(私費)를 털어가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교육출판 등 음악문화 사업이었다.

 

박경호가 보기에, 이 점에서도 난파는 반도 음악계에 선배의 제1인자인 동시에 선구자였던 것이다. 그의 주장처럼 선배란 시간적 우선조건을 자연히 나타내면 누구나 다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선배라고 해서 반드시 선구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형은) 현 반도악단에 있어서는 요구되는 인물이오. 지금의 우리 악계는 형과 같이 조직적이고 사무적인 두뇌와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를 호구(呼求)하거늘 형은 그만 가버렸소. 그러나 형은 잘 싸우고 갔소. 형은 악단적(樂團的)으로 보아 전사(戰死)한 셈이오. 형의 유작인 수백여 편의 작품과 아울러 형의 다년간 뿌려놓은 혈()은 반도악단을 북돋음에 위대한 자료가 될 것이오. 형은 안심 안심하오.

 

반도악단이 요구하는 인물, 조직적 두뇌와 솔직한 성격까지 겸비한 소유자라고 박경호가 칭송해 마지않던 홍난파. 그러나 그는 치열한 전투 중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조선 음악계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야말로 장렬한 전사(戰死)’였다.

 

그리고 1941년도 저물기 시작하는 그 해 12, 미국과의 협상 실패로 벼랑 끝에 몰린 일제(日帝)는 마침내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일본 해군은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동시에 육군은 말레이반도에 상륙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난파의 ‘1941년 전사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그가 침몰하기 시작하는 제국주의 전함(戰艦)의 최후를 지켜볼 수 없었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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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병원을 증축하면서 사용된 이름인데, 1947년부터는 서울위생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2009년부터는 삼육의료원 서울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서울 남산(南山)의 옛 지명. 높이 262m로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부에 있다.

 

홍난파 목멱산하 고토(木覓山下 故土)에서 내 일생을 보내리라<조광> 19362월호.

 

박경호 추억 홍난파()<매일신보> 1941925일자.

 

박경호 추억 홍난파()<매일신보> 19419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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