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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5/28 08:49:08  김양환 편집위원
홍난파와 한국음악 <49-終>


에필로그-귀항(歸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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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난파가 고향 수원으로 돌아온 것은 1968년 가을의 일이었다. 191012살 어린 나이로 망국의 설움을 안고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난파선에 몸을 실은 이후, 그는 31년간을 그 어둠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려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때로는 좌절도 하면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지 다시 27년이 지나서야 그는 광명한 고토(故土)의 하늘 아래에서 환생했다.

 

19681015, 수원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팔달산(八達山) 중턱에서는 이날 홍난파 노래비제막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군악대의 반주에 맞추어 여고 합창단의 <고향의 봄>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난파의 음악을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그의 탄생 70주년을 축하했다.

 

이 해는 해방이 된 지도 이미 20여 년이 지난 뒤이므로, 설령 그의 음악적 공과(功過)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고는 해도 때늦은 귀향(歸鄕)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고, 난파기념사업회도 발족이 되었으며, 1969년부터는 난파음악제’ ‘난파음악상등 그의 업적을 기리는 활동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무엇보다도 해방 이후 음악교과서에 실린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홍난파 음악의 가치와 위상이 어느 정도인가를 입증하는 좋은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전의 난파가 그의 악재(樂才)를 방해하는 몇 가지 악재(惡材) 때문에 고뇌하며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듯이, 사후에도 역시 그는 이 중 한 가지 악재(惡材)로부터는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몇 가지 악재란 그가 어떤 식으로든 관여할 수밖에 없었던 민족운동, 그를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갔던 늑막염’, 그리고 사상전향의 결과로 감수해야만 했던 불명예 훈장등을 꼽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고통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유독 그가 만년에 관여했던 사상전향의 꼬리표는 역사 바로잡기란 이름으로 끊임없이 그의 발목을 잡고, 그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민족친일’. 그 사상의 근저를 흐르고 있는 물줄기의 분기점은 어디인가. 타고난 핏줄인가, 자라난 환경인가, 강요된 선택인가. 암흑기, 즉 일제강점기였다는 변수가 있었으므로 지금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일견 타당성이 있는 주장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난파(難破)의 시대가 끝난 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왜 사람들은 보수진보의 논리로부터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만일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 <봉선화>, <고향의 봄>을 금지곡으로라도 지정해서 이 광명한 세상에서는 사장(死藏)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논리가 아니라면, 한때의 민족운동이 난파의 삶의 일부분이었듯이, 한때의 전향 또한 그의 삶의 일부분이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는 시각도 필요하다. 이때에 비로소 역사 바로잡기는 사실(史實)로서의 더욱 탄탄한 가치를 부여받을 것이며, 위험한 신화 만들기의 유혹으로부터도 빠져나올 수가 있을 것이다.

 

1968때늦은 귀향이라고 표현했던 그날로부터 또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구한말 찬송가로부터 시작된 이 땅의 음악이 창가-동요-가곡-가요의 시대를 거처, K-POP으로 대표되는 한국대중가요의 매력과 위력을 지구촌 팬들과 공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또 묻고 싶어진다. 역사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일제강점기 시대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그 속에서 살며 고뇌했던 한 천재적 음악가의 삶을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역사가 단지 지나간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라면 그 해답을 찾아가는 길에서 우리들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걸림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만큼은 언제나 해소될 수 없는 예외조항들이 있다.

 

그것은 그 시대 속에는 결코 기록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분노와 울분의 앙금이 늘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위안부독도라는 단어만으로도 그 앙금의 잠재적인 폭발력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끝으로 아직도 진행형인 친일논쟁과 관련해서는 필자의 소견이 아닌, 세 분의 고견을 단편적으로나마 경청하는 것으로써 이제 이 여정(旅程)을 마치려고 한다.

 

홍난파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하의 민족현실과 무관한 음악가였다. 그의 화려한 음악활동은 일제가 31운동 후 내세운 이른바 문화정치에 상응하여 서양음악으로 민족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입장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 민족개량운동 쪽에서 펼친 음악활동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중일전쟁이 일어나는 19377월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펼쳐져 왔던 그의 민족음악 개량운동친일음악운동으로 급격하게 변모하기에 이른다.”                     ——노동은(魯棟銀:중앙대 교수)  

 

나의 아버지는 일제에도 압박을 받으셨고, 지금은 그가 가장 사랑하셨던 조국에 핍박을 받고 계십니다. 그가 남기신 수많은 공적들은 다 외면당하고, 그의 친지들은 다 고인이 되셨고, 아무도 그를 대변해줄 사람 없이 억울한 누명만 쓰고 계십니다. 그의 육신은 재가 되었어도 그의 영혼은 길이 살아있고, 그가 남기신 위대한 업적은 한국이 존재하는 한 지워질 수 없는 빛나는 업적이 될 것입니다.……나의 아버지 설 땅을 찾아드리고 싶습니다.”         ——홍정임(洪丁姙:홍난파 차녀)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천착을 해야 한다. 부끄러운 부분은 응당 밝혀야 한다. 그러나 창씨개명과 같은 유례없는 폭거를 자행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의 포학성으로 겨누어져야 할 통분과 비판이, 허약한 동포에게로 집중되는 일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문화적 업적이 빼어났기 때문에 자기부정의 행적이 더 더욱 비판받는 것이기는 하다. 당자에게도 불행이지만, 우리 모두의 재앙이라는 인식보다도 가학적 쾌감 비슷한 것이 근저에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유종호(柳宗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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