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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1/08 22:42:41  아츠뉴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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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뉴스=김승기 기자] 8일 오후 11시 20분 SBS 스페셜 에서는 '조선왕릉 거기에 있는 이유가 있었다'를 방송한다.

 

 

지난 2009년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조선왕릉, 그러나 우리는 500년 역사가 이토록 우리 곁에 가까이 숨 쉬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1,756만 9,000평방미터 면적의 조선시대판 그린벨트, 왕릉공원은 오로지 한국에만 있는 가장 한국적인 공원으로 인공과 자연의 조화로움 속에 역사를 품고 있었다.


우리는 잠든 왕릉을 깨워, 왕릉에 숨겨진 풍수와 500년 권력의 역사를 만날 수 있었다.


잠든 왕은 커다란 사초지 위에 있다.  사초지는 커다란 생기(生氣) 저장탱크이다. 용맥이라는 능선을 타고 내려와 사초지에 저장된 생기는, 그 위 능침에 영면한 왕들에게 생기(生氣)를 준다.

 

이 생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진다고 하였으니(氣乘風則散), 이 기운을 흩어지지 않게 안아주는 산이 있어야 하며, 다른 한편 생기는 또한 물을 만나면 머문다고 하여(界水則止), 왕릉 앞으로는 반드시 물이 흐르는 계곡수가 있어야 했다. 이렇게 귀중하게 모아진 생기는 숲을 넘고 넘어 살아있는 후손, 구중궁궐 깊은 곳의 동기감응, 즉 같은 유전자를 가진 혈육의 왕에게 전달이 된다. 그래서 왕과 왕의 자손들의 발복을 이루고, 축복이 된다. 이것이 조선조 왕릉 풍수였다.

 

조선왕조는 유교 국가이면서 동시에 풍수를 신봉하는 국가였다. 저 왕릉은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했고, 왜 그렇게 조성되었을까?

 

거기에 그렇게 있는 이유가 있었다. 국대전 기록에는 조선의 왕릉은 도성 4대문으로부터 8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입지조건이 명시되어있다. 그 이유는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왕은 가장 먼저 왕궁을 장악하여야 했기 때문에 능제를 지낸 왕들이 서둘러 출발할 경우 하루면 도착할 수 있는 왕궁과의 거리를 계산하여 80리가 정해졌던 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거기엔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가 또한 있었다. 가장 남쪽에 있는 왕릉은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와 정조이다. 그런데 수원은 당시 궁궐에서 88리에 해당되었기에 대신들이 반대했다. 그러자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수원을 80리라고 명하노라.” 그래서 그때부터 수원은 한양에서 80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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